흔한 배탈약도 없어…'13개→11개' 줄어 드는 편의점 의약품, 왜?

머니투데이 조한송 기자 2024.06.19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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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기획]전국 16%가 무약촌 ⑥ 제자리 걸음인 안전상비의약품

편집자주 인구 10만명당 약국 수 41개. OECD 평균(29개) 대비 1.4배에 달한다. 혹자는 이를 근거로 우리나라의 약국 접근성이 좋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단순히 인구수를 기준으로 약국 수를 분석하는 것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실제 생활단위를 반영하지 못한다. 인구대비 약국수는 충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시장논리에 따라 대부분 인구가 많은 곳에 병원과 약국이 몰리는 탓이다. 소멸위기에 처한 지방 같은 경우는 해열제, 소화제와 같은 최소한의 안전상비의약품을 사기 위해서도 한시간 이상을 나가야한다. 머니투데이가 처음으로 행정동 단위로 공공심야약국과 안전상비약 판매 편의점 분포 현황을 분석했다.

안전상비의약품 품목/그래픽=윤선정안전상비의약품 품목/그래픽=윤선정


2017년 12월. 서울 서초동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사무소에서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 제5차 회의가 열렸다. 위산 작용을 억제하는 제산제, 설사를 멈추게 하는 지사제 등의 편의점 판매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편의점에서 판매하는 일반의약품인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을 조정해 보건복지부에 권고하는 자리에는 약사회, 편의점 단체, 의학회, 시민단체 등 각 단체 대표 총 10명이 모였다.

회의에서는 소비자가 많이 찾는 제산제와 지사제를 편의점에서 팔 수 있게 허용하자는 논의에 대해 표결로 권고안을 정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그렇게 논의가 무르익어 갈때쯤 갑자기 약사회 측 위원이 '받아들일 수 없다'며 칼을 꺼내 들며 자해 시도를 벌였다. 그렇게 회의는 갑작스레 중단됐고 제산제와 지사제를 상비의약품으로 지정하는 논의는 7년 가까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13개→11개, 같은 성분도 용량따라 품목 지정
2012년 5월 감기약, 해열제 등 일부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하는 약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1993년 일반의약품 약국 외 판매에 대한 소비자들의 요구가 시작된지 19년만의 일이었다. 약사법 개정안 통과 후 또 다시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현재 국내 안전상비의약품으로 허용된 품목 수는 처음 지정된 13개에서 실질적으론 11개로 줄었다. 처음 취지는 총 20개 품목 내에서 제도 시행 1년 후 추가 품목 지정 등 재조정하기로 했지만 오히려 줄어든 것이다.

당초 13개 품목을 살펴보면 소비자의 선택지는 많지 않다. 해열진통제 5종, 감기약 2종, 소화제 4종, 파스 2종 등으로 이뤄져 있어서다. 같은 타이레놀정 내에서도 500mg과 160mg, 80mg을 각기 다른 품목으로 인정하면서 해열진통제만 총 5종이 됐다. 성분 기준으로 품목을 나누면 제품이 너무 다양해져 의약품 오남용 위험 높아진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소비자 입장에선 같은 선택지 안에 놓인 약품이 다른 품목으로 지정되면서 구매할 수 있는 종류는 많지 않다.



지난해 말에는 제조사의 공장 해외 이전으로 국내 생산이 중단되면서 '어린이용타이레놀 80㎎'과 '타이레놀정 160㎎'가 실질적으론 품목에서 제외됐다. 이후 복지부가 대체약 추가 지정 필요성에 대해 논의해보겠다고 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그 사이 안전상비의약품 추가 지정에 관한 소비자들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진다. 2020년 의약품정책연구소 소비자 모니터링 결과에서 응답자 56%가 '편의점 판매 품목을 늘려야 한다'고 답했다. 소비자들은 지사제·제사제·알레르기약 순으로 수요가 높았다.

(서울=뉴스1) 박철중 기자 = 안전상비의약품 약국외 판매가 시행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편의점에서 소비자가 약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부터 소비자들은 의약품 중 사용경험과 안전성이 확보된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등 13개 품목의 안전상비약을 주말이나 야간에도 가까운 편의점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2012.11.15/뉴스1 /사진=뉴스원(서울=뉴스1) 박철중 기자 = 안전상비의약품 약국외 판매가 시행된 15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편의점에서 소비자가 약품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부터 소비자들은 의약품 중 사용경험과 안전성이 확보된 해열진통제, 감기약, 소화제 등 13개 품목의 안전상비약을 주말이나 야간에도 가까운 편의점 등에서 구매할 수 있다. 2012.11.15/뉴스1 /사진=뉴스원
2018년 이후 공회전...전문가 "편의성·안전성 동시 확보해야"
안전상비약 품목은 2012년 제도 도입 이후 10년 동안 단 한 번도 재평가 및 재심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안전상비의약품 지정심의위원회'가 2017년 3월부터 2018년 8월까지 6차에 걸쳐 개최됐지만 품목 점검 및 재조정 결론을 내지 못하고 공전해서다.

시민단체 등에선 안전상비의약품 추가 지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현재 타이레놀 2종 판매가 중지된 상황에서 대체 품목 지정은 물론 지사제, 제산제 등 추가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대한약사회 등은 안전성 문제로 반대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안전상비의약품 품목을 늘리면 소비자의 접근성은 높아지지만 부작용과 오남용 등 문제가 커질 수 있다고 맞선다.


각 단체의 의견을 조율해 안전상비의약품 추가 지정 논의를 이어가야할 복지부는 지정심의위원회 구성조차 못하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에 이어 의대 정원 이슈까지 덮치면서 의약품 지정 논의가 뒷전으로 밀려난 탓이다. 복지부는"심야시간대에 의약품 접근성이 얼마나 떨어지는지, 어떤 효능군이 필요한지 약사회와 함께 논의해야 할 문제"라는 원론적인 대답뿐이다.

전문가들은 해외에서도 안전성이 확보된 의약품을 약국 외 판매 허용 품목으로 활발히 재분류하고 있는만큼 적극적인 제도적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다만 오남용을 막기 위해 판매업소에 안전상비의약품과 관련한 설명을 담은 교육자료를 배치하고 인당 구매 제한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불법 판매를 모니터링하는 등 관리감독 체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오윤정 한국행정연구원 연구원은 "해외 주요국은 의약품 오남용 문제를 엄격히 관리함으로써 소비자의 안전과 의약품 접근의 편의에서 균형을 잡기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안전상비의약 품목 수 기준을 개선해 소비자의 의약품 접의 편의성을 높이고 안전관리체계를 구축할 필요가있다"고 말했다.

☞[머니투데이 창간기획] 전국 16%가 무약촌 연재 순서

①의사만 부족한게 아니다…전국 16%는 약 살 곳 없는 '무약촌'
②[르포]"내 나이 85세…약 사러 한 시간 버스 타고 갑니다"
③전국 최고령 동네 10곳, 한밤중 약 살데 없는 '무약촌
④[르포]1시간 만에 타이레놀 700정을 샀다...상비약 '복약지도' 무색
⑤안전상비약 확대 반대하는 약사회, 왜?
⑥'13개→11개' 거꾸로 가는 안전상비의약품, 못 늘리나 안 늘리나
⑦ '24시간 운영' 제한만 풀어도 1.2만개 편의점에 '약'들어간다
⑧[르포]"30년째 문제없는데"…한국 편의점 상비약, 일본 1%에도 못미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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