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엽 병장 유족의 2000만원, 노소영의 20억원[광화문]

머니투데이 양영권 사회부장 2024.06.27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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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헌병 정선엽 병장은 12·12 군사반란 당시 반란군 총탄에 숨졌다. 그의 나이 23세였다. 신군부는 그의 사망을 총기사고로 조작했다. 전사로 인정받은 건 2022년이 돼서였다. 정 병장의 유족은 국가가 사망을 왜곡하고 은폐했다며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법원은 유족 4명에게 1인당 2000만원을 위자료로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그로부터 몇달 뒤 서울고법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 병장의 유족에 국가가 주는 돈도, 노 관장에게 최 회장이 줘야 하는 돈도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100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자료를 얼마로 정하느냐는 법관의 직권이고 두 사건의 재판부 구성도 다르지만 국가 기관의 판단이기에 형평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불법행위를 한 국가를 상대로 한 손배소와 이혼 위자료 청구를 어떻게 동일선상에 비교하냐고 할지 모르지만 기존 이혼 소송에서는 불륜과 폭행, 학대 등 온갖 악독한 것들이 더해져도 위자료가 5000만원을 넘기는 힘들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위자료 산정에는 첫째로 고통의 크기가 고려됐을 것이다. 하지만 23살 청년이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도 서러운데 42년간 국가가 그 죽음마저 왜곡했을 때 유족이 받았을 고통이 노 관장이 겪은 고통의 100분의 1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다음으로 가해를 한 쪽의 재산 규모를 감안했을 수 있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이 대기업 총수라지만 국가보다 부자는 아니다. 최태원의 재산은 약 4조원이다. 국유재산은 2022년 기준 1369조원이다.

노 관장의 경제력을 고려했을까. 그가 이미 부자이기 때문에 적은 금액으로는 위로할 수 없다고 봤을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해 보이나 법적 상식을 흔들 수 있다. 앞으로 정신적 가해도 상대의 재산을 보고 정도를 달리하는 풍조가 생길 것이다.

노 관장은 정 병장 사망 원인이 됐던 12·12 군사반란 2인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정 병장의 유족은 정 병장의 사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며 이는 분명 현재의 경제 형편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판결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도 반영됐다. 두 판결 모두 온전히 사생활이 아니라 역사다.


내친 김에 최 회장 이혼 재판의 재산분할도 살펴보자. SK 주식가치 증가는 최태원이 승계상속형 사업가라는 주장을 배척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됐다. 재판부는 판결경정을 하며 낸 설명자료에서 최태원 체제에서 SK 주식가치 성장(160배)이 고 최종현 회장 시절 이뤄진 성장(125배)보다 크기 때문에 현재의 SK 가치에는 최태원의 기여가 더 크다고 했다. 하지만 125배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4년간, 160배는 그 이후 26년간 이뤄진 성장이다. 앞선 4년간 한국의 GDP(명목)는 44% 성장했고, 그 이후(2023년까지)는 316% 성장했다.

GDP 성장률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재판부가 그간 SK 성장에 대해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 수준을 넉넉히 상회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SK 가치는 한국 발전수준, 즉 GDP 성장률을 최종현 시절 111배, 최태원 시절 38배 상회해 성장했다. 전혀 다른 결론이다. 최 회장으로서는 '승계상속형 사업가가 아니다'는 결론의 근거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만약 상대적인 규모가 어떻든 단순히 총수 재임 시절 기업 가치가 성장한 것만으로 '승계상속형 사업가' 주장이 배척된다면 우리나라 재벌은 지분을 승계받았더라도 어쨌든 재임기간 성장했다면 모두 '자수성가형'이다.

사회 곳곳에서 사법부를 흔드려는 시도가 거세다. 대부분은 정략적인 의도가 배경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사법부는 개별 사건에서 직권이라는 칼만 휘두르지 말고 사실과 역사, 법에 겸손해야 한다. 그게 권력에 장악되지 않고 독립을 지키는 길이다.

정선엽 병장 유족의 2000만원, 노소영의 20억원[광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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