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몇달 뒤 서울고법은 최태원 SK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정 병장의 유족에 국가가 주는 돈도, 노 관장에게 최 회장이 줘야 하는 돈도 정신적 피해를 치유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100배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자료 산정에는 첫째로 고통의 크기가 고려됐을 것이다. 하지만 23살 청년이 꿈을 펴보지도 못하고 죽임을 당한 것도 서러운데 42년간 국가가 그 죽음마저 왜곡했을 때 유족이 받았을 고통이 노 관장이 겪은 고통의 100분의 1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노 관장의 경제력을 고려했을까. 그가 이미 부자이기 때문에 적은 금액으로는 위로할 수 없다고 봤을까.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해 보이나 법적 상식을 흔들 수 있다. 앞으로 정신적 가해도 상대의 재산을 보고 정도를 달리하는 풍조가 생길 것이다.
노 관장은 정 병장 사망 원인이 됐던 12·12 군사반란 2인자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딸이다. 정 병장의 유족은 정 병장의 사망으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을 것이며 이는 분명 현재의 경제 형편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두 판결에는 그런 역사적 배경도 반영됐다. 두 판결 모두 온전히 사생활이 아니라 역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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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최 회장 이혼 재판의 재산분할도 살펴보자. SK 주식가치 증가는 최태원이 승계상속형 사업가라는 주장을 배척하기 위한 근거로 사용됐다. 재판부는 판결경정을 하며 낸 설명자료에서 최태원 체제에서 SK 주식가치 성장(160배)이 고 최종현 회장 시절 이뤄진 성장(125배)보다 크기 때문에 현재의 SK 가치에는 최태원의 기여가 더 크다고 했다. 하지만 125배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4년간, 160배는 그 이후 26년간 이뤄진 성장이다. 앞선 4년간 한국의 GDP(명목)는 44% 성장했고, 그 이후(2023년까지)는 316% 성장했다.
GDP 성장률을 여기에 끌어들인 것은 재판부가 그간 SK 성장에 대해 대한민국 경제의 발전 수준을 넉넉히 상회한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 SK 가치는 한국 발전수준, 즉 GDP 성장률을 최종현 시절 111배, 최태원 시절 38배 상회해 성장했다. 전혀 다른 결론이다. 최 회장으로서는 '승계상속형 사업가가 아니다'는 결론의 근거에 이의를 제기할 이유가 충분히 있어 보인다. 만약 상대적인 규모가 어떻든 단순히 총수 재임 시절 기업 가치가 성장한 것만으로 '승계상속형 사업가' 주장이 배척된다면 우리나라 재벌은 지분을 승계받았더라도 어쨌든 재임기간 성장했다면 모두 '자수성가형'이다.
사회 곳곳에서 사법부를 흔드려는 시도가 거세다. 대부분은 정략적인 의도가 배경이라고 치부할 수 있겠지만 그럴수록 사법부는 개별 사건에서 직권이라는 칼만 휘두르지 말고 사실과 역사, 법에 겸손해야 한다. 그게 권력에 장악되지 않고 독립을 지키는 길이다.
![정선엽 병장 유족의 2000만원, 노소영의 20억원[광화문]](https://thumb.mt.co.kr/06/2024/06/2024060709560124817_1.jpg/dims/optimiz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