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파다움과 대중성의 조화를 고민한 정규 1집

머니투데이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4.05.29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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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들 열광시킨 쇠맛 아이덴티에 밝은 팝 두 스푼

사진=SM엔터테인먼트사진=SM엔터테인먼트


소멸로써 빛을 내는 초신성을 뜻하는 제목. 전설의 힙합 프로듀서 아프리카 밤바타의 ‘Planet Rock’과 연관성이 지적된 스타카토 코러스. 그 코러스를 에워싼 채 부서지는 신스 멜로디. 평범한 청년들이 우연히 초능력을 얻어 파멸로 치닫는 영화 ‘크로니클’을 연상케 하는 뮤직비디오. “스테로이드가 가미된 ‘Next Level’”이라는 해외 리뷰어의 평가대로 심장박동 같은 킥 드럼과 기름 같은 베이스가 곡의 혈관을 휘젓는 ‘Supernova’는 확실히 강렬했다. 거듭 허물을 벗으면서도 본질은 부여잡고 가는 단단한 구성은 시종 귀를 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정 곡의 우수함은 나머지 곡들에 그늘을 드리우기 마련. 국내외 할 것 없이 좋은 앨범들은 언제나 고루 준수한 곡들의 집합이었다. ‘Supernova’는 너무 좋아서 문제였다.

에스파의 1집이다. 음악 하는 사람에게 풀렝스 1집은 소설로 치면 습작과 단편을 거쳐 내놓는 첫 장편에 가깝다. 세월이 흘러 많은 조건들이 바뀌었지만 적어도 ‘명반’의 조건은 여전히 정규 앨범이기에, 에스파는 지금 싱글, 미니앨범과는 다른 온도의 새로운 출발선에 선 셈이다. 물론 준비한 쪽과 기다린 쪽 사이에 흘렀을 부담과 설렘이라는 긴장은 필연이다. ‘Supernova’는 그 시작이었다.



사진=SM엔터테인먼트사진=SM엔터테인먼트
앨범 ‘Armageddon’은 ‘Black Mamba’부터 구축해온 에스파 스타일을 한자리에 펼쳐놓은 느낌을 준다. 문을 힘차게 여는 ‘Supernova’에 이어 뱀처럼 구불거리는 신스 베이스, 중동풍 멜로디로 이끄는 타이틀 트랙 ‘Armageddon’과 ‘Next Level’의 바이브를 가진 ‘Set the Tone’까지 힙합 댄스로 초반을 몰아가던 이들은, 속도를 줄이고 분위기에 집중한 ‘Mine’을 지나 록 기타와 트랩 비트를 엮어 상대에게 끌리는 마음을 노래한 ‘Licorice’로 앨범 전체 분위기를 바꾼다. NME는 이 지점을 “(쉬운)접근성과 (난해한)실험성의 중간 지대”로 표현했다.



바뀐 분위기는 에스파가 SM엔터테인먼트 소속이라는 걸 증명하는 ‘BAHAMA’의 햇살 같은 멜로디로 서둘러 상징된다. 물론 브리지에서 안이한 팝 따윈 자신들과 거리가 멀다는 걸 은연중 들려주지만, 그런 거에 아랑곳없이 그저 밝은 팝 사운드를 즐기는 사람들에겐 어떤 식으로든 어필할 트랙이다. 에스파 1집의 두 세계 중 한 세계를 대표할 이 곡은 향후 ‘Supernova’와 투톱으로 여겨질 확률이 높다. 아울러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함께 녹인 뮤직비디오를 통해 귀여운 에스파를 만날 수 있는 ‘Long Chat (#♥)’은 토크 박스풍 리프와 번쩍이는 신스 사운드의 조화가 귀를 잡아끄는데, 시작과 끝의 올드한 재즈 트럼펫은 영상의 유머 코드에 어울려 넣은 장치로 들린다. 하지만 이쯤에서 ‘Supernova’라는 소문난 잔치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 중 일부는 고개를 갸우뚱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앨범의 두 번째 아쉬운 점, 바로 일관성이다.

사진=SM엔터테인먼트사진=SM엔터테인먼트
그렇다고 신스가 주도하는 팝 왈츠 트랙 ‘Prologue’나 ‘You Belong with Me’를 부르던 초창기 테일러 스위프트 내지는 에이브릴 라빈의 전성기가 떠오르는 펑크 팝 트랙 ‘Live My Life’이 달콤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특별하진 않다. 레퍼런스가 보일 땐 그 레퍼런스를 넘어서야 해당 창작물은 비로소 의미를 띠는 법. 그래서 이 앨범은 ‘Prologue’부터 조금 풀어지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에스파 음악에서 바랄 쫀득한 스릴이 없기 때문이다. 순한 맛은 ‘블랙 맘바’ 에스파에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앨범의 후반부는 들려주고 있다. 무엇을 말하고 보여주려는지 머리로는 이해할 것 같지만, 정규 앨범이라면 좀 더 가슴을 뒤흔드는 일관된 무엇을 들려주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든다. 차라리 ‘Supernova’의 에너지를 그대로 이어가는 방향은 어땠을지. 긴 호흡을 살려가야 하는 앨범에선 트랙 배치가 곧 핵심 전략이다. 전략은 곧 서사가 되고, 서사는 일관성 아래 머문다. 다음 작품들에선 재고해볼 만한 대목이다.


기획사 측에선 이번 앨범을 “세계관 시즌 2 서사”와 “강렬한 질주”로 들뜬 홍보를 했다. 뚜껑을 열어본 결과 그 안엔 에스파다운 초현실 우주와 에스파가 가끔 들렀던 지구의 현실이 함께 있었다. 이 양자 구도는 ‘Supernova’와 ‘Live My Life’의 뮤직비디오를 비교해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다 씹어 먹을 듯 했던 ‘Supernova’로 시작해 그리움의 정서를 담은 ‘목소리 (Melody)’로 사그라지는 앨범은 f(x)와 소녀시대를 가로지르며 주체성과 자신감, 극복과 위로의 메시지를 한껏 전한다. 한마디로 에스파의 정규 데뷔작은 마니아의 특별한 취향과 대중의 보편적 취향을 모두 취하려는 모양새다. ‘선택과 집중’ 대신 ‘느슨한 융통성’을 택한 느낌이고, 따라서 듣는 재미는 있는 앨범이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에스파가 잘하는 스타일로 달려가는 ‘일관된 에너지’는 계속 짐으로 남는다. 이후 정규 2집에선 한 번 기대해보고 싶다. ‘Live My Life’나 ‘목소리 (Melody)’ 같은 느낌은 다른 걸그룹들에게 맡기고, 에스파는 ‘Set The Tone’이나 ‘Supernova’ 같은 칼을 더 예리하게 가는 것. 지금 에스파에게 필요한 건 에스엠다움보단 에스파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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