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00만명이 찾는 美공영방송..."믿으니까 기꺼이 기부금 냅니다"

머니투데이 채플힐(미국)=정진우 기자 2024.05.13 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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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공영 라디오방송(NPR) 시스템...'공정성·고품질·정확성'으로 신뢰받는 콘텐츠 생산

WUNC 방송국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지도. 방송 프로그램 송출 지역이 표시돼 있다./사진= 정진우 기자WUNC 방송국에 있는 노스캐롤라이나 지도. 방송 프로그램 송출 지역이 표시돼 있다./사진= 정진우 기자


# 지난 1일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채플힐 외곽에 위치한 WUNC 방송국에 들어서자 커다란 지도 하나가 눈에 띄었다. 노스캐롤라이나 주를 나타낸 지도인데 이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프로그램이 미치는 영역이 표시됐다. 주도인 롤리(Raleigh)를 비롯해 세계적인 대학교 듀크대가 있는 더럼(Durham), 제2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리서치트라이 앵글 파크(Research Triangle Park, RTP) 등 주요 도시를 모두 포함한다. 인구 1000만명이 넘는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절반 가까운 규모다.

노스캐롤라이나 공영 라디오 방송인 WUNC는 이 지역에서 영향력이 크다. 사람들이 대중교통보다 자가용으로 출퇴근하거나 이동하면서 뉴스나 시사프로그램을 듣기 때문이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스태티스타에 따르면 미국인 73%가 출퇴근할 때 자가용을 이용한다. 대중교통 이용률은 13%에 불과하다. WUNC는 이 지역 라디오 방송 중 청취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WUNC 본사 회의실에서 만난 브렌트 울프 뉴스 디렉터는 "WUNC는 고품질 뉴스, 문화 및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를 지역 주민들에게 제공하면서 참여도 높은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다"며 "WUNC는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시스템인 NPR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BBC 등 세계 유수의 매체들의 질 높은 콘텐츠도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NPR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 전역의 공영 라디오 방송국 위치도./사진=NPRNPR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는 미국 전역의 공영 라디오 방송국 위치도./사진=NPR
미국의 공영방송 시스템
WUNC는 미국의 공영 라디오 방송인 NPR(National Public Radio)의 지역 방송 개념이다. 미국 전역의 라디오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배급하는 NPR은 1967년 미국 의회에서 통과된 '공공방송법'(Public Broadcastin Act)에 따라 1970년 2월 비영리 재단으로 출범했고, 1971년 4월에 개국했다. NPR의 본사는 워싱턴DC에 있고 취재기자와 PD 등 740명이 일하고 있다.



NPR은 1980년대까진 정부 보조금으로 운영됐다. 1983년부터 정부 보조금 대신 새로운 재원을 통해 수익을 창출했다. NPR은 우리나라 KBS처럼 국민들로부터 수신료를 따로 받지 않고 청취자의 기부금과 기업체의 협찬, 비영리단체의 지원, 지역 방송국의 회비를 통해 재원을 만들었다. 정부에 독립적인 스탠스를 유지하며 당파성을 배제한 보도로 명성을 얻었다. 지금도 청취자의 기부금은 수익의 10%를 넘는다. NPR 본사 기준 2022년도 수익 3억1674만 달러(4300억원) 중 기부금 규모는 4187만 달러(570억원)에 달했다.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와 더불어 미국의 공영 방송시스템을 이끌고 있는 NPR은 미국 전역에 WUNC와 같은 250개 이상의 지역 라디오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배급한다. PBS가 미국의 각 지역 공공 방송사에 TV프로그램을 공급하는 것처럼 NPR도 각 지역 공영 라디오 방송국에 프로그램을 공급한다. WUNC도 NPR의 대표 인기프로그램인 모닝에디션(Morning Edition)을 비롯해 4~5개의 프로그램을 그대로 받아 지역에 송출한다.

WUNC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 채플힐 캠퍼스(UNC)와 협업을 한다. 방송국 이름이 WUNC인 이유다. 대학 방송국과 스튜디오 등을 공유하며 비용을 크게 절감한다. NPR 시스템의 지역 공영 라디오 방송국 가운데 WUNC처럼 해당 지역 대학교와 협업을 하거나 대학교 소속으로 운영되는 방송국이 많다. 각 대학이 방송 송출 허가를 해주고 NPR의 지원을 받아 운영되는 방식이다. 뉴욕의 WFUV(Fordham University), 캘리포니아의 KUSC(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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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PR이 조사한 '청취자 개요'(Audience Profile)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 전역에서 NPR 등 공영 라디오 방송 청취자는 4400만명으로 집계됐다. 청취자의 연령대를 보면 △18-24세 5.9% △25~34세 18.1% △35~44세 18.8% △45~54세 16.1% △55~64세 21.3% △65세 이상 19.7% 등으로 절반 이상이 25~54세다. 평균 연령은 48.4세다.



여성은 전체 청취자 중 55.7%, 남성은 44.3%를 차지했다. 청취자의 연간 가계소득은 약 11만5000달러(1억6000만원)다. NPR 청취자의 정치적 성향은 골고루 분포됐다. 민주당 지지층이 34.1%, 공화당 32.6%, 지지정당이 없거나 정치에 관심없는 사람이 31.3, 기타 2%로 나타났다.

NPR은 미국의 민영 방송에 비해 중앙에서 제작해 릴레이 송출하는 전국 방송의 비율이 높다. 개인과 단체의 후원을 주수입으로 하면서 이를 통해 정부와 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신뢰성 높은 방송 프로그램 제작으로 청취율이 높다. NPR 프로그램의 프리미엄급인 팟캐스트 구독자는 800만명 규모다.

이수만 UNC 저널리즘스쿨 교수는 "미국인들에게 NPR은 상당히 호응이 높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고 공영방송으로서 높은 신뢰를 받고 있다"며 "특정한 곳에 얽매이지 않고 재정적으로 독립돼 운영되다보니 국민들이 NPR의 뉴스나 콘텐츠를 믿고 듣는다"고 말했다.



WUNC 방송국 전경/사진= 정진우 기자WUNC 방송국 전경/사진= 정진우 기자
노스캐롤라이나 라디오 청취율 1위 WUNC의 성공비법
NPR의 시스템에 속한 WUNC엔 20여명의 기자와 PD 등 라디오 뉴스를 만드는 전문 인력을 포함해 70명이 일하고 있다. WUNC는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주민과 문화, 생활 등에 초점을 맞춰 정보를 제공한다. 공영 방송국이지만 주요 청취자가 지역 주민이기 때문에 콘텐츠를 지역 사회와 연결하는 게 목표다.

이를 위해 △고품질의 가치 있는 콘텐츠로 잠재고객 충성도 향상 △디지털·뉴미디어 서비스 확대 △후원자 및 주요 기부자 육성 강화를 통한 기부자 수익 증대 △다양한 관점과 다양성 존중 △정직하게 제시된 고품질의 공공 서비스 프로그램을 일관되게 제공 등의 원칙을 갖고 방송한다. 아울러 NPR이 제휴를 맺은 BBC 등 해외 공영방송의 질 높은 글로벌 뉴스도 전한다.

특히 프로그램의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취지에서 인종, 성별, 장애, 보호받는 재향군인, 종교적 신념, 연령, 국적, 성적 취향, 성 정체성, 신체적 특성, 교육 및 사회 경제적 지위 등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직원 고용 시에도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고 채플힐에 있는 UNC의 채용 가이드의 모든 지침과 원칙을 따른다. 다양한 배경을 가진 라디오 전문가들이 공영 라디오에 필요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교육·연수 기회도 마련한다.



WUNC 방송국 내부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WUNC 방송국 내부 모습/사진= 정진우 기자
WUNC는 지역의 유명 시인인 요세푸스 톰슨(Josephus Thompson)과 협업을 통해 그의 라이브 시 공연을 '시 카페'(Poetry Cafe) 타이틀로 주간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 쇼에는 흑인 청취자를 위해 설계된 프로그래밍을 제작하는 흑인 콘텐츠 제작자가 특별히 동참해 호응을 얻었다.

지난 2022년엔 WUNC 뉴스 팀은 선거일 밤에 2022년 중간 선거에 대한 실시간 보도를 주 전체에 제공하고 특집 기사와 WUNC의 정치 팟캐스트를 통해 입법 회의를 취재해 호평을 받았다. 지난해엔 섹스, 인간관계, 건강을 탐구하는 주간 쇼인 'Embodied'를 선보여 인기를 끌었고, 이 프로그램은 휴스턴을 포함해 미국의 여러 공영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영됐다. 올해엔 노스캐롤라이나 전 지역 뉴스와 남부 문화에 초점을 맞춘 일간 쇼인 'Due South'를 시작했고, 미국 대선과 관련해 슈퍼화요일 생방송부터 오는 11월 대선까지 선거 뉴스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WUNC는 이처럼 청취자들이 원하는 고품질 콘텐츠 제작에 힘쓰고 있다. WUNC 관계자는 "우리는 시청자들에게 국제적, 국가적, 지역적 뉴스를 제공하면서 정확성과 공정성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또 공영방송공사(CPB)의 다양성 적격성 기준에 따라 보도내용과 채용 기준 등 많은 분야에서 다양성 목표를 추구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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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신뢰하는 콘텐츠'에 지갑을 연다
WUNC는 정치적 중립 원칙을 지킨다. 상당한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현실을 감안해 돈을 낸 기증자의 개인 정보는 철저히 보호한다. WUNC는 기부자나 이메일 목록을 어떤 조직과도 공유하지 않는다. 기부자나 이메일 목록을 정치 조직이나 당파 조직과 거래하는 것은 방송국의 균형, 공정성, 정확성에 대한 평판을 훼손할 것이기 때문이다.

WUNC는 공정성과 정확성의 원칙을 지키며 청취자들이 기부금을 내고 싶어할 정도의 고품질의 콘텐츠 생산에 집중한다. 시간대별 뉴스쇼, AI시대의 디지털 특집, 인간관계와 건강에 초점을 맞춘 주간 특집, 정치이슈 팟캐스트, 주간 포크 라디오 쇼, 연중무휴 음악 검색 라디오 스트림 등이 대표적이다.



브렌트 울프 뉴스디렉터는 "라디오 방송국 중 청취율 1위답게 우리의 서비스를 매우 가치 있게 여기는 충성스러운 청취자들이 많다"며 "그들은 우리가 만드는 콘텐츠를 매우 신뢰하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돈을 기부한다. 우리의 뉴스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대중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 갈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WUNC는 노스캐롤라이나의 중요한 문제를 주 전체에 걸쳐 보도하기 위해 다른 방송국 및 뉴스 매체들과 협력한다. WUNC는 지역 및 주 뉴스 기사는 물론 악천후 보도 및 중요한 속보를 공유하기 위해 주 전체 배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아울러 WUNC는 차세대 리포터와 오디오 스토리텔러를 양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프로그램 'Youth Reporting Institute'를 위해 지역 학교와 협업하고 있다.

이수만 교수는 "라디오가 올드 미디어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지만 콘텐츠를 제공하는 플랫폼보다 콘텐츠 그 자체가 더 중요하다"며 "신문사나 방송사 등이 신뢰받는 콘텐츠만 제대로 만든다면 국민들은 그 콘텐츠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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