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짓을 왜" 고뇌에도 1% 가능성에 목숨 걸었다…역사가 된 산악인[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양성희 기자 2024.05.01 06:00
글자크기

2005년 5월1일 북극점 도달한 고(故) 박영석 대장…세계 최초 '산악 그랜드 슬램' 달성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박영석 대장(맨 오른쪽)을 필두로 한 북극원정대가 2005년 4월 북극점 탐험길에서 '독도는 우리땅'이란 푯말을 들고 기념사진을 남긴 모습./사진=머니투데이DB박영석 대장(맨 오른쪽)을 필두로 한 북극원정대가 2005년 4월 북극점 탐험길에서 '독도는 우리땅'이란 푯말을 들고 기념사진을 남긴 모습./사진=머니투데이DB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산에서 잠든 산악인 고(故) 박영석 대장은 19년 전 오늘 2005년 5월1일 세계 신기록을 썼다. 1%의 가능성을 믿고 오른 북극점에서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됐다.

마지막 종착지까지 정복…세계 유일무이 기록
박 대장은 2005년 5월1일 새벽 4시45분(한국시간) 북극점 도달에 성공했다. 이로써 세계 최고봉과 극점을 모두 정복한 사나이가 됐다.



'탐험가 그랜드 슬램'은 세계 7대륙 최고봉과 에베레스트 정상, 남극점, 북극점 등 3극점을 모두 등정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여기에 히말라야 8000m 14좌까지 등정하면 '산악 그랜드 슬램'이 된다.

박 대장은 마지막 종착지였던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탐험가 그랜드 슬램은 물론,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인물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현재까지도 산악 그랜드 슬램은 박 대장이 유일하다.



박영석 대장이 2011년 2월 남극점 원정을 마치고 귀국한 모습./사진=뉴시스박영석 대장이 2011년 2월 남극점 원정을 마치고 귀국한 모습./사진=뉴시스
극한 추위도, 사람 날릴 듯한 강풍도 말리지 못했다
박 대장은 2005년 2월24일 "단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며 인천국제공항으로 출국했다. 그는 캐나다에서 현지 적응훈련을 거친 뒤 3월9일 출발해 770여㎞를 쉬지 않고 걸었다. 이는 직선거리일 뿐 실제 거리는 2000㎞가 넘었다. 이후 54일 만에 북극점 정복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박 대장의 북극점 입성 도전은 처음이 아니었다. 2년 전 실패의 기억을 딛고 일어나 재도전해 결국 성공했다. 얼굴과 손발을 모두 얼어붙게 한 극한의 추위, 사람을 날려버릴 듯 불던 강한 바람 등 어떤 것도 박 대장의 도전을 가로막지 못했다. 강한 바람에 텐트를 쳤던 얼음판이 10㎞가량 밀려 다시 같은 구간을 넘는 일도 있었지만 포기는 없었다.


당시 박 대장은 힘든 여정 속에서도 매일 일기를 썼는데 후원사였던 동아일보가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북극점에 도달한 날 그는 "드디어 마지막 별을 땄다"고 썼다.

그는 54일의 기록에서 "이 짓을 왜 할까", "잠이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립다", "대장은 역시 힘들다"며 인간적인 괴로움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1%의 가능성으로 버텨 끝내 스스로를 이겼다. 박 대장은 "목표가 있으니 걷는다", "목표가 있다는 건 행복한 것"이라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다잡았다.

최초, 또 최초…죽음의 문턱 여러 차례
박 대장이 세운 기록은 '산악 그랜드 슬램'뿐만이 아니다. 그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그는 1993년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세계 최초로 무산소 등정했다. 1년간 히말라야 8000m급을 최다 등정(6개봉)한 것도 그가 세계 최초였다.

박 대장은 '코리안 루트'라는 용어를 탄생시킬 정도로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데도 앞장서 왔다. 2009년 에베레스트에서도 험준하기로 유명한 남서벽에 코리안 신루트를 개척해 산악사를 새로 썼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각기 다른 루트로 3번 정상에 섰다. 에베레스트에서는 눈사태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지만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

그가 쓴 책 '끝없는 도전'에서도 죽음의 위기를 넘는 장면이 여러 차례 그려진다. 에베레스트 정상을 향하던 그는 "몸이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는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살 수도, 이대로 죽을 수도 있었다"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에베레스트 정상을 열망했다"고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영원히 잠든 박영석 대장의 영정사진 앞에 훈장이 놓인 모습./사진=뉴시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영원히 잠든 박영석 대장의 영정사진 앞에 훈장이 놓인 모습./사진=뉴시스
'마음의 고향' 히말라야에 잠들다

박 대장의 산악 인생은 어려서부터 시작됐다. 그는 어린 시절 늘 높은 곳을 좋아해 담벼락, 지붕 등을 수시로 올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고교 시절 우연히 대학 산악부의 등정 환영 퍼레이드를 보고 산악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동국대 산악부에서부터 히말라야를 꿈꾸던 그는 늘 히말라야를 '마음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결국 히말라야를 가슴에 품고 떠났다.

박 대장은 2011년 10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한국인 경로를 개척하기 위해 등반하던 중 연락이 두절됐다. 47세 나이로 영원히 안나푸르나에 잠들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