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 짬짜미 블루스

머니투데이 지영호 기자 2024.04.17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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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14일 NC-삼성전 3회말 2사 1루서 심판진이 모여 상황을 조율하고 있다./이미지=유튜브 스포츠머그 캡쳐 14일 NC-삼성전 3회말 2사 1루서 심판진이 모여 상황을 조율하고 있다./이미지=유튜브 스포츠머그 캡쳐


"음성은 분명히 볼로 인식했다고 하세요. 아셨죠? 우리가 빠져나갈 궁리는 그것밖에 없어요. 안깨지려면 일단 그렇게 하셔야 돼요."

지난 14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열린 NC 다이노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프로야구 경기에서 귀를 의심할만한 심판들의 대화가 포착됐다. 심판진이 ABS(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 판정을 고의로 조작한 정황이다. 한국프로야구는 이 사건으로 또 한번 팬들의 신뢰를 잃게 될 처지다.



프로야구에 ABS라는 '로봇 심판'이 도입된 것은 심판 판정의 불신에서 비롯됐다. 일명 '퇴근콜'(일찍 퇴근하기 위해 경기를 끝내려고 반대 판정하는 심판을 비꼬는 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얼토당토 않는 판정이 비일비재했다. 특정 심판이 특정 팀에 우호적인 판정을 내린다는 소문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일반론이 됐고, 실제로 몇번의 수사에서 구단과 심판 간에 금품이 오간 것이 확인되기도 했다.

스포츠 경기에서의 심판 짬짜미가 팬심에 상처를 남긴다면 기업들의 짬짜미는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털어간다. 최근 실체가 드러난 빌트인 가구 담합도 프로야구 심판 판정 조작만큼이나 충격적이다. 10년간 건설사가 발주한 738건의 입찰에 31개 가구업체가 짬짜미를 통해 1조9000억원어치의 물량을 나눠먹었다. 주사위를 던지거나 제비뽑기를 해서 순위를 정하고 순번이 아닐 땐 들러리를 섰다. 경쟁이 없으니 놀고먹어도 월급이 꼬박꼬박 나왔다. 입찰 담당자 카톡방에선 "이대로 천년만년"이라며 축배를 들었다.



담합 시기는 건설사 발주물량이 크게 늘었던 때다. 원자재 가격이 크게 올랐거나 경영상황이 악화돼 적자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란 얘기다. 부풀어진 입찰금액은 고스란히 최종소비자에 전가됐다. 분양한 아파트 가격인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예상이다. 공정거래위원회가 매긴 931억원(한곳당 30억원꼴)의 과징금이 솜방망이라고 보는 이유다.

아이들의 호주머니도 털렸다. 최근 법원은 아이스크림 업체 4곳의 담합 혐의도 유죄라고 판단했다. 이들 업체들은 판매가격 인상을 조율하고 편의점 2+1 행사 품목을 제한하는 식으로 경쟁을 피했다. 마진을 얼마 남길지도 서로 합의했다. 사다리 타기로 순번을 정해 낙찰 순서를 정하기도 했다.

통상 이런 짬짜미 행위는 끈끈하면서 폐쇄적인 사회에서 발생한다. 국내 프로야구 심판계 역시 일반인이나 비선수 출신들이 진입하기 어려운 폐쇄적인 사회다. 비선수 출신이 더 많은 미국과는 반대다. 문제가 된 14일 경기의 심판진 역시 모두 한 팀에서 프로 활동을 했다.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입찰 담당자들은 대부분 출신지역·대학·지인 관계로 끈끈하게 얽혀있다. 영업 직원도 다르지 않다. 지역별로 정기모임을 갖는 곳이 적지않다. 끼리끼리 문화가 생기고 친밀도가 높아지면 쉽게 일하고 쉽게 돈을 벌려는 유혹도 늘어나게 된다.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기업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다. 하지만 조직에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 점검이 필요하다. 로봇심판이 도입됐다 하더라도 운영하는 사람이 제대로 운영하지 않으면 도루묵이 되는 것처럼 윤리경영은 사람의 영역이다. 반면교사 삼아야 할 우리들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사진=지영호 /사진=지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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