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덕희' 그 실제 주인공…이렇게 보이스피싱 총책 잡았다

머니투데이 화성(경기)=김미루 기자 2024.03.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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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다시 울리는 그놈목소리⑤]40대 주부가 보이스피싱 총책 검거에 기여한 사연

편집자주 한동안 감소 추세였던 보이스피싱 범죄가 다시 기지개를 켜고 있다. 한달 피해액이 500억원을 돌파하고 1인당 피해액은 3000만원을 넘어섰다. 정부의 서민 지원용 금융 상품까지 악용하는 등 신종 기법이 활개를 친다. 보이스피싱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와 진화하는 범죄 행태를 살펴본다.

영화 '시민덕희' 실화 주인공 김성자씨(49)는 2016년 1월 자신에게 3196만원 상당 보이스피싱 사기를 친 조직원에게 진술서를 받아냈다. /사진제공=김성자씨영화 '시민덕희' 실화 주인공 김성자씨(49)는 2016년 1월 자신에게 3196만원 상당 보이스피싱 사기를 친 조직원에게 진술서를 받아냈다. /사진제공=김성자씨


# 김성자씨(49)는 2012년 5월 경기 화성시에서 작은 세탁소를 운영했다. 벌이가 빠듯해 부업으로 전기장판을 보관하는 부직포 가방도 만들었다. 어버이날이 있는 5월은 대목이었다. 공장에 납품을 마치고 돌아서던 차였다.

4살 된 막내아들이 공사 중인 옆 건물 난간에 떨어졌다. 김씨가 달려갔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들은 고양이처럼 울었다. 그 소리를 들은 공장장이 모자를 발견했다.



1년간 입원하고도 2년간 통원 치료를 받았다. 머리, 어깨, 허리 몸의 여러 군데가 고장 났다. 치료비는 보험을 적용해도 3600만원이나 됐다. 김씨는 안전망 미설치를 원인으로 보고 건물주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변호사는 건물주를 상대로 가압류하려면 공탁금을 먼저 내야 한다고 했다. 통상 가압류를 신청하는 채권자는 법원에 공탁금을 걸어둔다. 재판은 2016년 1월27로 잡혔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차린 중국 칭다오시 현지 사무실. 김성자씨가 조직원으로부터 확보해 경찰에 제보했다. /사진제공=김성자씨보이스피싱 조직이 차린 중국 칭다오시 현지 사무실. 김성자씨가 조직원으로부터 확보해 경찰에 제보했다. /사진제공=김성자씨
"수원지검입니다"…재판 보름 전 걸려 온 전화, 피싱이었다
보이스피싱 조직이 가지고 있던 고액 피해자 800명의 명단. 김성자씨가 확보해 경찰에 제보했다. /사진제공=김성자씨보이스피싱 조직이 가지고 있던 고액 피해자 800명의 명단. 김성자씨가 확보해 경찰에 제보했다. /사진제공=김성자씨


재판을 보름 앞둔 1월11일 오전 11시쯤 '수원지방검찰청'이라는 곳에서 전화를 받았다. 1598만원을 보내야만 압류를 신청할 수 있다고 했다. 압류를 신청해야 재판을 진행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시기 아픈 김씨를 대신해 소송을 도와주던 친오빠의 머리에서 혹이 발견돼 응급 수술에 들어갔다. 공탁금이 1500만원가량이라던 오빠의 말을 김씨는 기억했다. 변호사는 마침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근처에서 은행 ATM을 찾아 1598만원을 계좌 4개에 나눠 보냈다.

같은 날 오후 4시30분쯤 '수원지검'은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김씨 명의로 돈을 입금하지 않아 문제가 생겼으니 다시 보내라고 했다. '수원지검'이 은행과 연결해서 추후 대출도 받게 해주겠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잠시 후 '서초동 국민은행 이본부장'에게 전화가 왔다. 이본부장은 자기 신분증과 출입증을 보내줬다. 김씨는 세탁소에 모여있던 동네 사람들에게 200만원, 300만원씩 빌려 10분 만에 돈 1598만원을 재차 보냈다.


'수원지검'은 원래 입금한 1598만원을 30분 안에 다시 보내주겠다고 했지만 전산이 늦어졌다며 다음날로 미뤘다. 그다음 날도 돈을 돌려받지 못했다. 97만원을 입금하면 전산 작업을 해주겠다는 말뿐이었다.

일요일 저녁 8시쯤 김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국민은행으로 향했다. 경비에게 이본부장 신분증을 보여주니 경비는 "또 이놈이네"라고 했다. 비틀대며 운전대를 잡은 김씨에게 음주 신고가 들어왔다. 경찰에 요구에 따라 차에서 내렸는데 그만 바지에 실례를 하고 말았다. 그때 3196만원의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김씨는 일주일간 수면제를 먹어도 잘 수 없었다. 수면제를 먹고 소주 한 잔 먹기를 반복했다. 마신 기억이 없는 술병이 나뒹굴었다. 어느 날 아들이 "엄마 죽지 마. 제발 죽지 마. 엄마가 죽으려고 했어. 내가 끌어안아서 엄마가 깼어"라며 울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한다.

보이스피싱 총책이 미용실, 주점 등에서 찍힌 사진. /사진제공=김성자씨보이스피싱 총책이 미용실, 주점 등에서 찍힌 사진. /사진제공=김성자씨
"삼촌, 나한테 다 제보해요"…총책 비행기 편까지 알아내

25일 경기 화성시에서 영화 '시민덕희' 실화 주인공 김성자씨(49)를 만났다. /사진=김미루 기자25일 경기 화성시에서 영화 '시민덕희' 실화 주인공 김성자씨(49)를 만났다. /사진=김미루 기자
사기를 당하고 보름째 되던 날 밤 9시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김성자씨 나 이 본부장입니다"라며 "김성자씨가 엄청 집요해서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김씨는 이 본부장을 삼촌으로 부르며 어르고 달래 총책의 이름, 생년월일, 가족관계, 사진, 한국 집 주소를 파악했다. 이후 중국 칭따오 근거지, 총책 사진, 고액 피해자 800명 명단까지 확보했다. 총책이 설을 앞두고 2월8일 오전 10시25분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해 귀국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김씨는 이 사실을 경찰에 모두 제보했지만 경찰은 미온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김씨는 2월8일 경기 화성시에서 인천 부평구 총책의 집으로 향했다. 직접 잡을 생각이었다. 집에 돌아갔다가 다시 부평구로 가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30시간 넘게 잠복하던 날 아는 언니에게 총책 검거 소식이 뉴스에 나왔다는 말을 들었다.

영화 '시민덕희'가 개봉하고 나서는 마음이 다소 괜찮아졌다고 한다. 자기 이야기가 다른 피해자에게 힘을 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식당 일과 커튼 제작 부업 일을 하고 여유 시간에 김씨를 찾아오는 피해자를 만나기도 한다.

그는 "영화에서 덕희 역의 라미란 배우가 총책에게 맞을 때 '저걸 왜 맞아. 내가 가서 패주고 싶다'고 느꼈다"며 "내가 움츠러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피해자들에게 힘을 주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는 "움츠리지 말고 누구 한명에게라도 떠들면 마음이 개운해지고 올라오던 울분이 가라앉는다"며 "주위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같이 울고 보듬어주면 된다. 피해자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일"이라고 했다.

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사진제공=쇼박스영화 '시민덕희' 스틸컷. /사진제공=쇼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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