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화밖에 없다"…갈 길 먼 한국, 탄소무역 장벽 대책은

머니투데이 안정준 기자, 김훈남 기자 2024.03.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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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리포트] 전기화 웨이브(하)

편집자주 전 세계적 넷제로 전환 과정에서 '전기화'가 화두로 떠올랐다. 유럽과 미국 등은 이제 전통적 제조업인 석유화학, 철강 공장까지 무탄소 에너지 전기로 직접 돌릴 채비를 마쳤다. 전기화에 따라 한국과 주요 선진국 산업 간 탄소배출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 갈수록 높아지는 탄소무역 장벽에 대비해야 하는 국내 산업계의 숙제가 하나 더 생겼다.

전기로 나프타 분해하는 석유화학…우리에겐 아직 먼 일
국내 석유화학업계 탈탄소 수단 현황/그래픽=이지혜국내 석유화학업계 탈탄소 수단 현황/그래픽=이지혜


철강, 모빌리티 등과 달리 국내 대부분의 전통 산업 영역에서 전기화 추진은 아직 갈 길이 멀다. 전기화를 위해서는 대규모 무탄소 전기 공급이 받쳐줘야 하지만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의 발전단가가 여전히 높다. 국토 특성 상 재생에너지 발전 설비를 마련할 공간도 부족하고 발전 설비도 특정 지역에 편중돼 원활한 전력 공급이 쉽지 않다. 결국 전기화는 충분한 무탄소 에너지원 확보의 문제로 귀결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유화학은 선진시장에 비해 전기화가 늦은 대표적 업종이다. 석유화학의 연간 탄소배출량은 7100만톤으로 국내 제조업 중 철강에 이어 두번째로 배출량이 많다. 탄소배출 감축이 시급한 업종인 만큼 국내 업계도 다양한 탄소감축 수단을 도입하고 있다.



업계는 탄소배출 감축을 위해 탄소 포집·저장(CCS·Carbon Capture and Storage) 기술 개발을 추진 중이다. 롯데케미칼은 기체분리막 활용 CCS 실증설비를 도입했고 SK이노베이션과 GS칼텍스 등은 정부 기관과 연합해 CCS 실증사업에 참여했다. LG화학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 CCS 기술 공동 연구개발에 나섰다. 대부분의 주요 석유화학기업이 CCS 기술 개발에 뛰어든 셈이다.

바이오납사는 이미 상용화 단계다. HD현대케미칼은 CJ제일제당으로부터 대두유, 폐식용유 등을 공급받아 바이오 납사를 생산하고, 바이오 납사로 친환경 플라스틱을 올해 말까지 1만2000톤 생산할 계획이다. 폐플라스틱 재활용 사업도 업계 모두 추진중이다.



하지만 전기화는 아직 구체적 기술 개발 계획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A 석유화학사 관계자는 "유럽 등 주요기업의 전기화 과정을 눈여겨 보고는 있지만 현재로서 뚜렷한 기술 개발 방향이 잡힌 것은 없다"며 "대부분의 국내 석유화학사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주요국의 전기화 기술은 이제 상용화 문턱에 도달했다. 독일 화학사 바스프는 최근 사빅, 린데와 함께 공동개발한 'e-크래커' 파일럿 설비 가동에 돌입했다. 가스 대신 전기로 발생한 열을 활용해 정유 부산물인 나프타를 분해시켜 석유화학 제품의 기초소재로 만드는 설비다. e-크래커는 핀란드 기업 쿨브룩이 시험가동에 성공한 '회전반응로'(RDR: RotoDynamic Reactors)와 함께 가스를 태워 움직이는 석유화학산업의 상징적 설비인 'NCC(나프타 분해 설비)'를 대체해 나갈 전망이다. B 석유화학사 관계자는 "CCS 기술 등과 달리 전기화 기술은 선진국과 기술 격차가 이미 상당하다"고 말했다.

2023년 발전원별 정산단가 현황/그래픽=윤선정2023년 발전원별 정산단가 현황/그래픽=윤선정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가격이 높아 전기화를 선뜻 추진하기 어렵다는게 국내 석유화학업계의 반응이다. C 석유화학사 관계자는 "유럽과 미국에선 재생에너지 생산단가가 상대적으로 저렴한데다 공장 인근에서 재생에너지 발전소도 찾기 쉬워 무탄소 전기를 발판으로 한 전기화를 추진하기 수월한 것"이라며 "국내에선 그 반대라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석유화학 뿐 아니라 시멘트와 식음료 제조 등 전기화가 늦은 모든 업종의 공통된 고민이다. 비교적 빨리 전기화를 추진하는 철강업계도 풍부한 무탄소 전력 확보가 난제인 것은 마찬가지다.


탄소 배출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수입된 제품에 관세를 부과하는 탄소국경세가 곧 시행되면 뒤처진 전기화는 업계에 비용으로 전가될 수 있다. 유럽은 2026년부터 철강과 시멘트 등에 온실가스 1톤당 10~50유로의 벌금을 부과할 예정이다. 미국은 2025년부터 석유화학, 철강 등에 온실가스 1톤 당 55달러를 부과할 것이 유력하다. 두 지역 모두 탄소국경세 적용 품목 범위를 순차적으로 늘릴 계획이다.

EU, 미국 탄소국경세 현황/그래픽=이지혜EU, 미국 탄소국경세 현황/그래픽=이지혜
전문가들은 무탄소 에너지원의 확대와 지역별로 편중된 재생에너지를 끌어올 전력망 구축 등을 통해 전기화 물꼬를 터야 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트롤스 라니스 덴마크산업연합 에너지 부문 대표는 최근 머니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은 에너지 집약도가 높은 산업이 많아 전기화 전환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가능한한 직접 전기화를 포함해 에너지 효율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소형모듈원전(SMR) 등 무탄소 에너지원인 원전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해외 사례도 있다. 미국 화학사 다우는 텍사스 공장에 SMR 4기를 건설할 계획이다. 이 SMR은 현재 텍사스 공장에 전기와 증기를 공급하는 기름 보일러를 대체하게 된다.

"G5보다 2배 탄소배출하는 韓…값싼 전기로 전기화 이끌어야"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 학장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 학장
"G5(주요 5개국)와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GDP(국내총생산)에서 제조업과 탄소다배출 업종 비중이 두배 가량 큽니다. 탄소중립을 위해선 전기화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반도체와 철강, 석유제품, 시멘트 등 한국 경제와 수출을 이끄는 주요 품목은 대표적인 탄소다배출 업종이다. 바꿔 말해 국제사회가 약속한 2050 탄소중립 이행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받는 나라 중 하나가 한국인 셈이다.

탄소중립의 현실적인 수단으로 각 산업의 전기화가 주목받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의 경쟁력을 지켜내기 위해선 보다 싸고 안정적인 전기공급, 그를 위한 전원믹스인 무탄소에너지(Carbon Free Energy, CFE) 확산이 필수라는 조언이 나온다.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창의융합대학 학장(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사진)은 24일 머니투데이와의 전화인터뷰에서 "산업부문에서 그냥 탄소배출을 줄이라고 하면 생산량을 줄이거나 오프쇼어링(생산설비의 해외 이전)하는 수밖에 없다"며 "탄소중립 목표를 이행하면서도 국내 일자리와 부가가치 창출을 유지하려면 전기화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유 교수에 따르면 2019년 기준 한국의 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28.4%, 탄소다배출 업종이 차지하는 비중은 8.4%다. G5(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의 평균 제조업 비중은 14.4%, 탄소다배출 업종 비중은 4.2%다. 한국의 제조업과 탄소다배출 산업비중이 2배 높은 만큼 저렴한 온실가스 감축 방안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유 교수는 "탄소중립을 위한 전기화가 필수적인 상황에서 전기를 비싸게 공급받으면 결국 제품경쟁력 저하와 수출 감소로 이어진다"며 "전환(발전) 부문에서 안정적이고 싸게 저탄소전기를 공급을 해야한다"고 말했다. 결국 무탄소에너지의 확산이 필수라는 설명이다.

2022년 기준 제조업 총제조비용 가운데 전력요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1.4%다. 수출 주력 상품인 반도체와 1차 철강의 경우 각각 2.2%, 2.6%로 전체 평균을 웃돈다. 플라스틱제품(석유화학 부문) 역시 제조비용의 2.6%가 전력비다. 그동안 한국은 낮은 전기요금으로 수출 경쟁력을 갖춰 왔고 산업구조가 크게 변하지 않는한 전기요금은 앞으로도 수출 경쟁력을 좌우하는 요소라고 유 교수는 설명했다.

유 교수는 "대표적인 CFE는 원자력발전과 재생에너지인데 원전은 출력조절이 안 되는 경직성 전원이라 마냥 (비중을) 늘리기 어렵고, 재생에너지는 간헐성 한계가 있다"며 "이 둘의 전력믹스와 그를 보완하기 위한 LNG(액화천연가스), CCS(탄소포집저장), 수소 기술 등 무탄소에너지를 폭넓게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미국과 유럽 등은 탄소중립을 위한 에너지에 보조금을 지급하지만 우리나라는 긴축재정을 하고 있는 만큼 보조금 지급은 어려울 것"이라며 "세액공제를 통해 무탄소에너지에 대한 기업 투자를 안정적으로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유 교수는 "원전만 포함된다는 오해와 달리 CFE는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 탄소배출이 없는 에너지를 두루 포함한다"며 "문재인정부 당시 연간 3.5GW(기가와트)였던 재생에너지 보급목표는 현 정부 들어 5.3GW로 늘어났다"고 말했다. 원전과 마찬가지로 재생에너지 역시 비중을 늘리고 목표에 미달하는 부분을 탄소포집과 수소혼소 등 기술로 보완해야 전기화를 통한 탄소중립을 달성가능하다는 게 유 교수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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