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첨단 무기 쏟아부은 26일 공습…민간인 앗아간 미국의 헛발질[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양성희 기자 2024.03.20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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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3월 20일 시작된 이라크 전쟁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2003년 4월 미군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자 현지 여성들이 탈출하는 모습./사진=AFP 2003년 4월 미군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를 공격하자 현지 여성들이 탈출하는 모습./사진=AFP


21세기 초반에도 세계는 전쟁으로 신음했다. 21년 전인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하며 '이라크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미국이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에 이어 사담 후세인 고향 티크리트에 진입하며 막을 내렸다. 미국 공격으로 장기 집권했던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다.



미국, 속도 높인 군사 공격…이라크 수도 진격
2003년 4월 미군의 공격으로 이라크 마그다드 대통령궁 경내에 폭발로 인한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모습./사진=AFP2003년 4월 미군의 공격으로 이라크 마그다드 대통령궁 경내에 폭발로 인한 연기가 뿜어져나오는 모습./사진=AFP
전쟁은 조지 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를 향한 군사 공격을 선언하면서 시작됐다.

부시 전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정권을 무력화시키려 전면적인 공격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선언에 앞서서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인근 지역에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했다.



미국은 공격 개시 다음 날 이라크 남부지역을 폭격한 뒤 영내로 진격하는 지상전에 돌입했다. 탱크를 앞세워 이라크 국경을 넘은 뒤 수도 바그다드를 향하며 전쟁 속도를 높였다.

바그다드에 대한 2차 공습도 1차 공습 16시간 만에 벌였다. 바그다드 시내는 폭격으로 삽시간에 불바다가 됐다. 현지에 있던 외신들은 "맨눈으로 보이는 건물이 모두 불타고 있다"고 전했다. 대통령궁 인근에도 크루즈 미사일이 발사됐다. 바그다드 공습엔 폭탄 1500개가 동원됐다.

아울러 최첨단 무기를 총동원한 '충격과 공' 작전을 감행했다. 이 작전의 목적은 이라크군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4대의 B-2 스텔스 전폭기, 12대의 F-117 스텔스 전투기, B-52 전폭기 등이 동원됐다.


이어 미군과 영국군은 이라크 제2의 도시 바스라의 공항, 주요 도로를 장악하면서 수도 바그다드를 향해 진격의 속도를 높였다. 4일째 공습으로 대통령궁, 통신센터, 정보부 등 주요 건물이 붕괴했다.

이어 2003년 4월 4일 바그다드에 진격해 사담후세인국제공항을 장악하고 7일엔 바그다드 중심가로 진입했다.

미군이 이라크 최후 보루로 여겼던 후세인의 고향 북부 티크리트 중심부에 진입한 건 그해 4월 14일이었다. 이로써 미군은 주요 전투를 마무리하며 전쟁에 마침표를 찍었다. 전쟁이 시작된 지 26일 만이었다.

부시 전 대통령은 "전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지만 승리를 확신한다"며 "사담 후세인 정권은 더 이상 이라크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세계 각국은 이를 사실상 종전 선언으로 받아들였다.

전쟁, 무슨 이유로?
사담 후세인/사진=AFP사담 후세인/사진=AFP
미국은 왜 전쟁을 벌여야 했을까. 2년 전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가 발생한 것이 계기였다. 9·11테러는 미국 뉴욕의 110층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워싱턴 국방부 건물에 대한 항공기 테러를 가리킨다. 이슬람 테러단체가 민간 항공기를 납치해 벌인 일이었다.

이를 두고 미국은 북한과 이라크,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이슬람 테러단체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지만 미국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테러단체를 지원한다고 의심했다.

그러면서 이라크에 대해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해야 한다는 명분을 만들었다. 미국은 이라크가 화학무기, 핵무기를 비롯한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해 전 세계 평화를 위협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이라크의 자유'란 작전명을 붙였다. 다만 대량살상무기가 실제 발견되지는 않았다.

무고한 희생 남긴 전쟁
전쟁은 무고한 희생을 남겼다. 이라크 전쟁으로 최소 2320명의 이라크군이 전사한 것으로 파악된다. 또 미군 117명, 영국군 30명이 전사했고 40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민간인 사망자도 1253명, 부상자도 5100명 이상으로 집계됐다. 종군기자 10명도 목숨을 잃었다.

민간인 사상자가 늘어나면서 세계 주요 도시에선 전쟁 중단을 촉구하는 시위가 잇따랐다. 국내에서는 전쟁은 물론 파병을 반대하는 집회도 줄지어 벌어졌다.

당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국가 간의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은 유엔 헌장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인류 대부분의 양심에 의해 거부된 일"이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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