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파병돼 작전을 수행하는 미군들의 모습./사진=Britannica
"그 중에 노인, 여자 그리고 아이들도 있었나요?"
"...네 그렇습니다"
위 증언은 PBS(미국 공영방송)에서 폴 메들로라는 병사가 당시 미라이 학살 현장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털어놓은 인터뷰 내용의 일부다.
구정대공세 당시 북베트남과 베트콩이 기습공격을 감행했다./사진=위키피디아
이러한 분위기에 호응하듯 당시 남베트남과 대치 중이던 북베트남은 구정 연휴를 맞아 일주일간 전쟁을 하지 않겠다는 '구정 휴전'을 선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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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는 명절 분위기에 취한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경계가 느슨해지도록 만들고, 그 틈에 기습 공격을 하려는 북베트남과 베트콩(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의 기만술이었다.
설 당일인 1968년 1월30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등 주요 도시들이 베트콩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사이공에 위치한 미국 대사관 일부가 점령 당하고 헌병 4명과 해병대원 1명이 교전 중에 전사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본국에서 당시의 현장을 생생한 영상으로 접한 미국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동남아시아의 한 작은 나라에 짓밟히는 장면들이 담겨있었기 때문이었다.
복수의 칼 간 미국, 베트콩 색출에 영혼을 던졌다
미라이 마을 전경. 당시 학살 현장의 모습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사진=CNN
반격 작전을 기획한 오런 K.핸더슨 대령은 "거기(미라이 마을)가서 남아 있는 베트콩들을 다 쓸어버리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프랭크 A.베이커 중령은 작전 회의에서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C중대에 '베트콩이나 그 동조자로 의심되는 사람은 모두 사살하거나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설날 기습 공격을 받은 지 약 2달이 지난 1968년 3월16일. 반격에 나선 C중대가 마을로 출격했다. 미라이 마을 주민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미래가 닥칠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 학살
미라이 학살 당시 피해자의 모습. 오른쪽 여성은 촬영 직전 성폭행을 당한 뒤였다. 이들은 모두 미군에 의해 사살됐다./사진=위키피디아
하지만 C중대원들은 미라이 마을 주민 남녀노소 상관없이 모두 끌어내 한 곳으로 집결시킨 뒤 총기를 난사하거나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 일부 여성 희생자들은 이 과정에서는 집단 성폭행 및 성고문을 당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C중대의 후발대로 출격한 증원부대는 인근에 있는 미케 마을에서도 비슷한 학살을 저질렀다.
작전이 시작된지 4시간이 지난 뒤. 미라이 마을과 미케 마을 등 두개 마을에서 나온 민간인 희생자는 모두 504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미군 측은 사망자는 347명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C중대는 작전(?)을 마친 뒤 이들이 사살한 민간인들은 '도망치던 베트콩들'이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베트남 전쟁 최악의 학살 사건, 1년 만에 세상에 밝혀지다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 소위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이내 가택연금으로 형이 줄었고 3년 뒤엔 이 마저도 해제됐다./사진=위키피디아
뒤이어 프리랜서 기자 시모시 허시가 당시 미라이 마을에 있었던 일을 구체적으로 폭로하면서 이들의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즉각 수사에 착수한 미군은 상급부대에서 '마을을 초토화하라', '다 쓸어버려라' 등 명령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했다. 하지만 상급 부대 장교들은 모두 처벌을 받지 않았다. 이들이 내린 명령이 명확하지 않아 해석에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는 이유에서였다.
반면 이 사건에 연루된 장교 14명 중 형사처벌을 받은 사람은 단 1명이었다. 그는 당시 현장을 지휘했던 하급 장교 윌리엄 로우 캘리 주니어 소대장이었다. 그는 민간인 학살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1971년 가택연금으로 형이 줄었고, 3년 뒤에는 이 마저도 완전히 해제됐다.
반전 여론에 밀려 철수한 미군, 결국 공산화된 베트남
남베트남 민족 해방 전선(베트콩)이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에 진입하는 장면. 남베트남 적화통일의 상징적인 장면이다./사진=위키피디아
이렇듯 반전 여론이 갈수록 뜨거워지자 부담을 느낀 미군은 결국 1973년 남베트남에서 철수하게 된다. 이후 2년 뒤인 1975년, 남베트남은 북베트남에 의해 적화통일이 되고 만다.
승리를 자신하며 54만 병력을 파병한 미군은 결국 5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남긴 채 아무런 소득 없이 고국으로 돌아왔다. 이들이 남긴 것이라곤 베트남 국민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 뿐이었다.
PBS와 폴 메들로의 인터뷰 뒷 내용은 오늘날에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피해자와 참전용사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용감한 우리 미군이 미라이 마을에서 힘없는 민간인들을 쏴 죽였다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납득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잘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