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혹한 진실과 마주하는 용기, '벽속의 여인'

머니투데이 정명화(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3.0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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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티빙의 흥미진진한 수작

사진=파라마운트+사진=파라마운트+


아일랜드의 더블린과 작은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시리즈 '벽속의 여인(The Woman in the Wall)'은 아일랜드 특유의 음습한 날씨처럼 서늘하고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영국에서 앞서 공개돼 평단의 호평을 받은 이 작품은 배우들의 호연과 진중하고 묵직한 전개로 깊은 울림을 남긴다.

아일랜드에서 실제 일어났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실화 드라마 '벽속의 여인'은 티빙을 통해 총 6화의 에피소드로 국내에 공개됐다. 작가 파트리샤 버크 브로건이 자신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글로 써냈고 이를 원작으로 한 피터 뮬란 감독의 영화 '막달레나 시스터즈'가 2002년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전세계에 이 비극적인 사실이 널리 알려졌다. 같은 소재를 시리즈로 제작한 '벽속의 여인'은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디 어페어') 수상에 빛나는 연기파 배우 루스 윌슨이 주연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다.



사진=파라마운트+사진=파라마운트+
오랫동안 몽유병을 앓아온 중년의 여자 로나(루스 윌슨)는 잠에서 깨어난 후 자신의 집에서 낯선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자신이 잠든 새 여자를 죽였을거라고 믿은 로나는 황급히 벽 속에 시체를 숨긴다. 다시 노(老)신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로나가 신부의 차를 테러하는 장면을 CCTV에서 발견한 형사 '콜먼'(다니엘 맥코맥 )은 그녀를 용의선상에 올려놓는다.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마을을 찾은 콜먼은 어딘가 비밀스러운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30여년 전 잃어버린 딸을 찾는 로나에게서 어린 시절 입양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벽속의 여인'은 한 마을 주민들의 오랜시간 이어온 묵인 하에 가톨릭 교단이 저지른 폭력적인 만행을 그린 작품이다. 실제 아일랜드의 뼈아픈 비극이기도 한 '막달레나 세탁소' 사건을 소재로 보다 드라마틱하고 은밀하게 피해자의 아픔을 그려내고 있다. 수십년에 걸쳐 아일랜드 곳곳에서 여성과 아동들을 수용하고 보호하며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세탁소'라는 이름 하에 인권을 유린해온 가톨릭 교단의 범죄는 90년대에 들어서야 수면 위로 드러났다. 이곳에 수용된 여성들은 수만명을 넘어서 현재까지도 피해사실 규명과 보상문제가 진행되고 있다.

사진=파라마운트+사진=파라마운트+
'벽속의 여인'은 사전 정보가 없는 이라면 범죄물이나 스릴러 장르로 생각할 만큼 보다 은근하고 간접적으로 실화 사건을 그려나간다. 무엇보다 주인공 로나는 마을사람들을 비롯한 주변인들에게서 신뢰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중증의 몽유병을 앓으며 이런저런 피해를 끼친데다, 자신조차도 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정신은 명료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녀가 믿는 단 한가지,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하는 사실은 바로 자신이 어린 딸을 빼앗겼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불장난같은 첫사랑의 대가로 임신을 한 로나는 가족의 손에 의해 미혼모 수용시설인 일곱가지 기쁨 수녀원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강제노동과 학대를 받으며 딸을 출산했지만, 수녀들에게 딸을 빼앗기고, 30년째 딸의 행방을 쫒고 있다. 폭력적인 과거와 딸에 대한 그리움은 그녀를 잠들지 못하게 했고, 로나의 거칠고 반사회적인 행동은 마을사람들의 질타를 받아왔다.


'벽속의 여인'은 강제로 딸을 빼앗기고 수십년간 딸을 찾는 여자의 모성애를 그린다. 그럼에도 마냥 동정하고 신뢰할 수만은 없는 주인공의 캐릭터로 인해 범죄물을 보듯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작품을 따라가게 한다. 루스 윌슨은 어딘가 불쾌하고 믿을 수 없는, 음울하고 반항적인, 뭐라 규정지을 수 없는 새로운 캐릭터를 혼신의 열연을 통해 생명을 불어 넣었다. 아일랜드 근대사의 어두운 사건을 새롭고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낸 '벽속의 여인'은 이어지는 반전과 미스터리한 연출, 최고의 연기가 어우러진 매력적인 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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