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빅토리아 항구 인근 산책로를 걷는 시민들. 2023.06.28. /로이터=뉴스1
중국 언론 차이신은 홍콩의 세수에 토지 판매·임대수익을 더한 총 국가재정 보유액이 올 3월 기준 7050억홍콩달러(약 120조원)으로 2020년 3월 1조1000억홍콩달러(약 188조원) 대비 36% 증발했다고 최근 보도했다. 지난해 같은 시점에 비해서도 16%나 줄어든 규모다. 자유도시이자 문화와 경제의 도시, 아시아의 금융허브가 이제는 '가난한 홍콩'이 된 믿기 어려운 현실이다.
'금융 허브'라는 홍콩의 타이틀은 낮은 세율과 간단한 과세 구조 덕분에 붙여졌다. 홍콩의 조세구조는 소득세(이윤세)와 급여세, 인지세 세 항목이 전체 세수의 약 90%를 차지할 정도로 단출하다. 그나마도 특례가 많다. 2억4000만홍콩달러(약 410억원) 이상을 홍콩에 직접투자하면 소득세가 아예 면제되는 제도가 대표적이다. 법인세 최고 세율은 10%대 중반에 불과하다.
증발하는 홍콩재정/그래픽=이지혜
재정의 근간인 부동산은 말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다. 홍콩 부동산 가격은 지난 1월까지 9개월 연속 하락했다. 수요가 끊기자 홍콩개발국은 올 1분기 토지 판매를 하지 않기로 했다. 홍콩 부동산 판매가 중단된 건 13년 만에 처음이다. 현지서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부동산 대출잔액이 평가액을 넘어선 사건이다. 부동산 규제 완화 등 대책이 뒤늦게 나오고 있지만 부실 도화선엔 이미 불이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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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국회 격인 입법회의 라이퉁궈 의원은 최근 현지언론에 "사치품에 대해 초사치세를 부과하는 것은 물론 소비세나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등 과세기반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폴 찬 장관이 "추가 과세는 없을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결국 세제개편은 현실이 됐다. 홍콩은 지난 28일 소득세 최고세율을 기존 15%에서 16%로 1%포인트 인상했다. 무려 20년 만의 소득세 인상이다.
세금을 늘려 재정문제를 해결하는 건 일면 간단해 보이지만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자유를 바탕으로 돌아가는 홍콩의 경제엔 더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홍콩의 영광을 조금씩 뺏어가고 있는 싱가포르는 오히려 더 퍼줄 준비를 마쳤다. 올해 예산 중 총 13억 싱가포르달러를 기업 지원에 책정했는데 상황에 따라 법인세를 무려 50% 환급하기로 했다.
◇탈출 또 탈출…"홍콩에 남은 건 노인과 본토인뿐"
홍콩 당국이 2014년 12월 11일 대규모 경찰 병력을 투입해 금융 중심가인 센트럴 지역의 바리케이드를 철거하며 시위대 강제 해산에 나섰다. 이날은 홍콩 민주화 요구시위가 발발한 지 75일째 되는 날이다 /로이터=뉴스1
전문직을 포함한 홍콩 토박이들의 이탈도 줄을 잇는다. 지난해 9~11월 홍콩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가 홍콩 주민 7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주민의 38%가 "기회가 주어진다면 홍콩을 떠나겠다"고 답했다. 2022년 9월 실시한 조사에선 같은 질문에 29%가 같은 답을 했었다. 실제 홍콩 인구는 2019년 748만여명에서 2020년 747만여명으로 줄었고, 2022년엔 733만여명까지 줄었다.
지난해부터는 인구가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는데, 이는 중국 정부의 본토인 이주 정책 탓이다. 홍콩 토박이와 외국인이 빠져나간 자리를 본토인이 채운다. 남은 토박이들은 대부분 고령자다. 2022년 말 기준 65세 이상 홍콩인은 약 8만8000여명으로 5년 전 7만9100명에 비해 11% 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빠져나가고 빈자리는 고령자들과 본토 출신 중국인들이 메우고 있다는 의미다.
한 글로벌 IB 관계자는 "머지 않은 시점에 홍콩엔 본토인과 노인들만 남을 거라는 자조 섞인 얘기가 있다"며 "중국 정부가 홍콩에 대해 다시 전향적인 자치를 인정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만큼 홍콩 상황이 개선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보다 극단적인 전망도 있다. 예일대 스티븐 로치(Stephen Roach) 교수는 지난 1월 FT(파이낸셜타임스)에 게재한 '문제적' 칼럼에서 "중국의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 중국 경제의 부진, 미중 갈등 등 세 가지 요인에 힘입어 홍콩의 경제는 몰락하고 있다"며 "인정하기 싫지만 홍콩은 이제 끝났다(Hong Kong is now over)"고 지적했다. 이 칼럼은 이후 중화권 언론에서 반박 칼럼이 이어지는 등 논란의 불을 붙였다.
"100년 공든 탑, 5년 만에 무너졌다"…'세계 3대 금융허브' 홍콩의 퇴장
세계 3대 금융허브로 평가받았던 홍콩의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사진은 홍콩 증권거래소 전경. /사진=블룸버그
이는 아시아 대표 금융 중심지이자 미국 뉴욕·영국 런던과 함께 '세계 3대 금융허브'로 통했던 홍콩의 위상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는 조롱 섞인 얘기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역사적 인플레이션(화폐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상승)이 이어지는 상황에도 세계 주요 증시가 사상 최고가 행진을 하는데, 홍콩 증시는 침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4년 연속 하락한 증시…60년 만에 처음
2018년 1월 3만3000을 뚫으며 역사상 최고점을 기록했던 항셍지수는 6년 만인 올 1월 1만4000대로 주저앉았다. 지난해에만 지수가 14% 빠졌다. 미국 나스닥과 S&P500이 20~40%대 상승률을 기록했고 일본 닛케이225(28%), 대만 자취안(27%), 한국 코스피(18%), 인도 센섹스(18%) 등 아시아 증시 역시 일제히 오른 것과 비교하면 홍콩 증시가 얼마나 부진했는지 여실히 드러난다.
올 들어서도 미국·일본·대만 등 주식시장에서 전 고점을 뚫고 또 뚫는 초강세 '불장' 국면이 펼쳐지고 있지만 홍콩에는 냉기가 여전하다. 항셍지수는 지난달 각종 부양책 영향으로 소폭 상승 반전하며 1만6000선을 밟았지만 1~2월 누적 수익률(-3%)을 따져보면 여전히 마이너스다.
지난해 11월 말 홍콩 항셍지수가 대만 자취안지수에 추월당한 것도 주목할 만한 변화다. 자취안지수가 항셍지수보다 높아진 건 31년 만에 처음으로 올 들어 그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다. 시가총액·거래량 등 기준으론 여전히 홍콩이 큰 시장이지만, 지수 역전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금융 전문가들은 본다.
증권사들의 줄폐업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블룸버그 집계에 따르면 홍콩에선 2022년 49개 증권사가 폐업한 데 이어 지난해에도 30여곳이 문을 닫았다. 시장이 활기를 잃으면서 거래량이 급감하자 거래수수료로 수익을 내던 중소형 증권사들이 직격탄을 맞았다. JP모건체이스·UBS그룹 등 대형 투자은행(IB)의 아시아 IB 조직 구조조정에선 주로 홍콩 직원들이 대상이 됐다.
홍콩의 한 중소증권사 CEO는 "증권업계에 30년 가까이 몸 담았는데 최근 1~2년처럼 많은 증권사들이 문을 닫고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었던 적은 없었다"며 "문제는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100년 쌓은 '금융허브' 공든 탑, 왜 흔들렸나
홍콩 국제금융센터(IFC) 건물이 안개에 가려져 있다. /로이터=뉴스1
하지만 중국의 전폭적인 지원은 홍콩 증시를 멍들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된 기업의 70%가 중국 본토기업이어서 중국 경기가 나빠지면 증시 흐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미·중 패권전쟁과 코로나19 팬데믹, 시진핑 장기집권 등 영향으로 중국이 경기 침체의 늪에 빠지면서 홍콩 증시도 악화됐다.
홍콩의 통화 시스템도 증시 부담 요인이다. 홍콩은 통화(홍콩달러) 가치를 미국달러에 연동(1 미국달러=7.75~7.85 홍콩달러)하는 '페그제(고정환율제)'를 채택하고 있어 금리도 미국을 따라 움직인다. 이 때문에 현재 홍콩의 금리는 2007년 12월 이후 최고치인 5.75%까지 높아졌다. 해외 투자자들이 중국 관련 투자를 줄이는 가운데 홍콩의 긴축적인 통화정책으로 시장 유동성이 더 악화했다. 홍콩의 경우 기업 이익은 중국 본토 경기, 이자율은 미국 정책의 영향을 받는 독특한 시장인데 양쪽의 악재가 겹친 셈이다.
골드만삭스의 한 중국 전문가는 "홍콩 증시 상장사의 절반은 거래량이 제로 수준이고, 글로벌 기업들과 자산가들은 싱가포르로 떠나고 있다"며 "홍콩이 세계 3대 금융허브로 자리잡는 데 100년이 걸렸는데 폐허로 변하는 데는 5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