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를 예고한 '가황'의 마지막 편지

머니투데이 김성대(대중음악 평론가) ize 기자 2024.03.01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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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의 59년 가수 인생을 돌아보다

사진=예아라사진=예아라


한 분야에서 프로로 인정받는 데는 대략 10년 정도가 걸린다. 남 앞에 거리낌 없이 나서려면 거기에 10년을 보태면 될 것이고 자신의 일로 권위를 가지려면 다시 10년을 더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40년 정도 한 우물을 판 사람은 어지간해선 흔들리지 않는 경지에 올라선다. 그리고 일이 10년 더 지속되면 그 사람은 마침내 전설이 된다.



그런 ‘전설의 최소 자격’을 넘어서도 8년을 더 활동한 나훈아가 며칠 전 팬들에게 감사 인사를 담은 편지 한 통을 띄웠다. 요약하자면 마지막 콘서트 투어를 끝으로 마이크를 내려놓고 '박수칠 때 떠나겠다'는 얘기였다. 노래를 접고 편하게 책도 좀 읽으며 그림도 그리면서 보통 사람으로 살겠다던 22년 전 생각을 그는 비로소 실천으로 옮기려는 듯 보였다.

나훈아의 시작은 59년 전으로 거슬러 간다. 1965년 고등학교 2학년 때 친구 따라 놀러 간 작곡가 심형섭의 정릉 음악학원에서 재미 삼아 부른 그의 노래를 듣고 심형섭이 재능을 알아본 것이다. 보석을 발견했다 직감한 심형섭은 오아시스 레코드 대표 손진석에게 나훈아를 소개한다. "애 하나가 있는데 물건입니다!” 학원에 와서 직접 한 번 들어보라는 얘기였다. 과연 심형섭의 말은 사실이었고 나훈아는 손진석의 권유로 나중에 배호의 노래와 멜로디가 비슷하단 이유로 금지곡이 되는 '천리길'과 나훈아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포함한 네 곡을 녹음해 데뷔했다. 음반 한 장 내려면 6만 원이 필요하던 시절. 집 한 채 값이 20만 원 하던 그 시절에 나훈아는 비교적 수월하게 연예계에 발을 담갔다. 그리고 당시 재정 상황이 불안했던 오아시스 레코드는 나훈아라는 오아시스를 만나며 목을 축일 수 있었다.



나훈아의 본명은 최홍기다. 최홍기는 자신의 이름이 연예인이 쓰기엔 너무 보통 사람 같다고 여겼다. 그래서 떠올린 이름이 최훈崔勳이었는데 이번엔 최 씨라는 성 자체가 예술하는 사람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결국 기억하기 쉬운 나羅 씨를 쓰기로 마음먹는다. 지금은 너무 유명해진 ‘훈아勳兒’라는 이름은 어린아이兒가 훈장勳을 받는 것 같다는 이유로 당사자는 무릎을 치며 마음에 들어 했다고 한다.

농촌을 등진 70년대 서민들의 향수를 달래준 ‘고향역’으로 스타가 된 나훈아는 새벽 3시에 일어나 5분 만에 만들었다는 '사랑’부터 '잡초', '울긴 왜 울어', '무시로', '갈무리', '영영' 등을 써내며 그 시절 트로트계에선 드물게 싱어송라이터로서 활약을 이어갔다. 대중음악 창작자로서 그는 사람의 설움과 깨달음, 그리움과 기억을 영상처럼 눈앞에 펼쳐 보이는 가사를 즐기는데, “좋은 노랫말(詩)엔 멜로디가 있고 진정한 프로는 멜로디 뒤에 있는 걸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그의 창작론은 그래서 곧 나훈아의 작사론이기도 했다. 나훈아 노래를 반기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멜로디 뒤에 있는 ‘그것’을 읽어낸 자신들의 가수에 그래서 열광해 왔다.

사진=예아라사진=예아라

60년 가까운 그의 가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7살 연상 스타 배우와 살면서 진짜 어른도 되어 봤고 깨진 병을 들고 덤빈 괴한과 난투극도 벌여 봤으며, 근거 없는 온갖 괴소문에 시달린 끝에 바지 벨트도 끌러 봤다. 그런 나훈아는 언제나 눈치 보지 않고 소신대로 발언하며 의지대로 밀어붙인다. 상대가 권력이든 언론이든 대중이든 상관없다. “이래라저래라 간섭이 싫어” 북한 공연도 취소한 그 의지와 소신이 비즈니스 마인드까지 만나 나훈아라는 독보적인 캐릭터를 구축했다. 물론 이런 그를 모두가 좋아하진 않는다. 그를 꺼리는 이유는 그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다. 누구는 너무 거침이 없어 좋아하고 누구는 그래서 불편해한다. 하지만 그 거침없는 성향은 음악을 대할 때도 유효해 ‘홍시'에서 레게를 구사하거나 지난 2020년 KBS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에 헤비메탈 밴드 메써드를 초대하는 등 장르에 열린 모습으로 이어져 음악가로서 소중한 거름이 됐다. 사람은 본성대로 살아야 탈이 없는 법이다.

성악가가 꿈이었던 나훈아.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 손잡고 곧잘 보러 다닌 민요의 "꺾고 뒤집는" 창법을 트로트로 가져온 존재로 한국 대중음악 역사에 새겨졌다. 최초라고 단정 지을 순 없지만 적어도 대중에게 그 창법을 처음 인지하게 만든, 그리고 대중이 그 창법을 애써 따라 부르게 만든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0여 년 전 나훈아는 “프로는 돈값을 해야 한다”라고, 그래서 늘 치열하게 연습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별(스타)은 별이어야 합니다. 별은 구름이 조금만 끼어도 안 보여야 합니다. 아무 데서나 볼 수 있는 별은 별이 아닙니다. 별은 하늘에서 반짝반짝 스스로 빛나야 합니다."

편지에는 없었지만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이 올 때 자신이 번 돈을 모두 사회에 환원할 거라고 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해 준 덕에 번 돈이기 때문이다. 고장 난 세월을 한탄하고 청춘을 돌려달라 애원하던 지난 모습 다 내려놓고 ‘아이라예(아닙니다)’에 이어 출신 지역을 재차 돌아본 ‘기장갈매기’를 거쳐, 40대 때 노자의 ‘도덕경’을 만나 깨우친 '공(空)'의 의미를 우리의 ‘별’은 이렇게 실천하려나보다. 올해로 일흔일곱 살. 행운의 숫자가 두 개일 때 떠나는 그의 모습마저 참으로 나훈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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