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쏘스뮤직
르세라핌의 새 미니앨범 ‘Easy’의 타이틀 트랙 ‘Easy’의 퍼포먼스를 보며 나는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말을 떠올렸다. 데뷔 이후 르세라핌의 “공개적인 추천장”은 언제나 퍼포먼스였고 그것은 좋은 음악, 저마다 색깔이 분명한 멤버들의 ‘아름다운’ 음색과 합을 이뤄 늘 “우리의 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언젠가 르세라핌을 ‘자신감’이라 정의 내린 적이 있다. 세상을 자신들의 뜻대로 해 끝내 그 세상을 가지겠다는 당찬 포부를 저들은 독특한 ‘3개국어 선언’을 통해 펼쳐왔다. 신작의 문을 여는 ‘Good Bones’도 어느새 그룹의 시그니처가 된 영어, 한글, 일본어 내레이션을 앞세운다. 사실 앨범의 시작에서 이들의 선언은 앨범에 담을 메시지의 요약이기도 한데, 저기 뒤에 있는 ‘Swan Song'의 가사처럼 "상처뿐인 다리로 살기 위해 춤추는" 절박함과 "수많은 날 수많은 눈물"로 초조해하던 자신들의 모습을 통해 무대 뒤의 불안, 고민을 다룬 이번 앨범에서 이들은 그 역시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Good Bones’로 다지고 있다. 그건 다음 곡 "하날 보면 열까지 간파해 돌파"하겠다는, "난 나비가 될 애송이"이라고 스스로 간주하는 'Smart'에서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쉽게 이룬 듯 보여도 절대 쉽게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는 게 이번 작품의 주제다. 진흙 속에서 핀 연꽃의 이미지, 나탈리 포트만이 주연한 영화 ‘블랙 스완’의 정서 등이 모두 거기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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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트로 기타 멜로디와 곧이어 들어오는 보컬 멜로디만 들어보면 달콤한 사랑 노래일 것 같지만 다음 곡 ‘Swan Song’은 앞서 언급했듯 무대에 오르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멤버들이 흘려온 땀에 관한 노래다. 마지막 곡 ‘We Got So Much'에 앞선 팬송이었던 '피어나 (Between you, me and the lamppost)'의 팝록 스타일을 잇는 곡으로, 비록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의 타일라(Tyla)에게 66회 그래미상(베스트 아프리칸 뮤직 퍼포먼스)을 안겨준 아프로팝 넘버 'Water'의 비트와 유사성을 지적받긴 했어도 분명 나름의 매력을 지닌 ‘Smart’와 더불어 무난히 미니앨범의 허리를 받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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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적으로 힘을 뺀 느낌이다. 앨범 제목 ‘Easy’는 혹시 ‘Easy Listening’의 줄임말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곡들은 지난 미니앨범들에 비해 한층 느슨하고 여유롭다. 한숨 쉬어가며 자신들의 입장을 들려주는 방법으론 꽤 괜찮아 보인다. 아울러 ‘NME’의 말을 빌리면 앨범 ‘Easy’는 주제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르세라핌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새로운 사운드를 시도하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들은 이번 앨범에서도 사운드 팔레트를 확장”했다는 얘기다. 진화와 확장이란 으레 불확실한 도전과 공명하는 법. 응집력과 세련된 측면이 부족하다면서도 이들의 역량과 잠재력을 동시에 보여주었다는 '빌보드 필리핀’의 ‘Easy’에 대한 평가는 그래서 이 작품이 내포한 성취와 과제를 뭉뚱그려 얘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