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쉬운 길' 가려는 시장경제의 파수꾼

머니투데이 김진형 산업2부장 2024.02.21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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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년 8월, 공정거래위원회가 쿠팡을 공정거래법과 대규모유통업법 위반으로 제재했다. 납품업체들에게 (경쟁사의) 판매가격 인상 요구, 광고게재 요구, 판매촉진비용 부당 전가, 판매장려금 수취 등 소위 '갑질'을 일삼았다는 이유였다. 시정명령과 과징금 약 32억원이 부과됐다. 공정위는 당시 쿠팡 사건을 브리핑하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급성장하는 온라인 유통시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불공정거래행위를 다수 적발해 적극 제재한데 의의가 있다. 특히 온라인 유통업자도 대기업 제조업체에 대해 거래상 우월적 지위가 인정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공정위 발표에 따르면 쿠팡의 갑질은 2017년~2020년까지 3년에 걸쳐 이뤄졌고 갑질을 일삼은 거래 대상은 무려 388곳(중복 포함)에 달했다. LG생활건강, 유한킴벌리, 한국P&G, 매일유업, 남양유업, 쿠첸, SK매직, 레고코리아 등 대기업도 포함돼 있었다.

공정위 발표 이후 쿠팡은 '갑질 위험 기업'이 됐다. 대기업에게도 갑질할 수 있는 기업인데 영세, 중소 납품업체에겐 오죽할까라는 논리가 형성됐다. 쿠팡의 시장점유율이 더 높아지고 만년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하자 납품업체 쥐어짜기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공정위의 결론은 2년 반만에 뒤집혔다. 서울고등법원은 지난 1일 쿠팡이 공정위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시정명령, 과징금을 모두 취소한다"고 판결했다.

15페이지의 판결문은 공정위의 주장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부정했다. 법원은 공정위가 '온라인 유통시장에서의 새로운 불공정거래행위 적발'이라고 평가했던 판매가격 인상 요구, 광고게재 요구, 판매촉진비용 부당 전가, 판매장려금 수취 등 4가지의 위반 행위를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았다. '온라인 유통업자도 대기업 제조업체에 우월적 지위가 인정됐다'는 공정위의 의미 부여도 법원은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쿠팡이 8개 대기업에게 손실을 보면서 거래하고 있었는데 우월적 지위에 있는 기업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냐고 꼬집었다.

판결문은 공정위의 제재가 얼마나 허술한 근거 위에 쉽게 이뤄졌는지를 드러낸다. 법원은 쿠팡의 거래상 우월적 지위 남용을 제재한 공정위에게 오히려 제재권 남용을 꾸짓고 있다. 판결문 곳곳에서 '제재하려면 법 위반행위를 제대로 증명부터 하라'는 법원의 답답함이 느껴질 정도다. 실제로 법원은 '쿠팡은 8개 대기업에게 우월적 지위를 갖지 않는다고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공정위는 구체적 증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사적자치와 계약자유의 원칙에도 불구하고 행정권이 강제로 개입하려면 이를 정당화할 수 있을 정도의 문제(거래당사자 사이에 현저한 협상력 차이)가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시장 개입을 쉽게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다.


# 공정위의 '쉬운 제재'는 최근 논란이 된 '(가칭)플랫폼 경쟁촉진법'에서도 보인다. 플랫폼법은 독과점화된 대규모 플랫폼의 폐해를 줄이기 위해 소수의 플랫폼 사업자를 사전에 지정하고 시장에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위반행위를 금지하자는 법이다.

공정위가 이 법으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플랫폼법은 시장 개입을 쉽고 편하게 하려 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행 공정거래법으로도 제재할 수 있지만 속도가 느리니 잠재적 문제 기업을 미리 정해놓고, 나쁜 짓 하면 가중처벌하겠다는게 이 법의 골자이기 때문이다. 많은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법을 만들어 규제하는 것외에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제재 수단이 있는데 감시를 쉽게 하기 위해 부작용을 감수하겠다는 의미다. 국회 입법조사처도 플랫폼법에 대해 "대부분 국가의 경쟁당국이 보편적으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을 충실히 이행해 남용행위를 억제하는 파수꾼 역할을 하는 대신 규제 대상 사전 지정이라는 손쉬운 길을 선택할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비판했다. 공정위는 결국 플랫폼법 재검토를 발표하고 체면을 구겼다.

공정위의 '시장 파수꾼' 역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담합은 갈수록 은밀해지고 불공정행위는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애매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SPC그룹, 쿠팡, SK실트론, 대만 에버그린 등 최근 행정소송에서의 잇따른 패소와 플랫폼법 논란은 공정위에서 묻고 있다. 혹시 현실이 어렵다고 쉬운 길로 가려고 하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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