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보세]홍콩 ELS 투자자인가, 가입자인가, 유권자인가

머니투데이 권화순 기자 2024.02.13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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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기초주가연계증권(ELS) 피해자모임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2024.1.19/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서울=뉴스1) 황기선 기자 = 홍콩H지수(항셍중국기업지수) 기초주가연계증권(ELS) 피해자모임이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금융감독원 앞에서 손팻말을 들고 보상을 촉구하고 있다. 2024.1.19/뉴스1 Copyright (C)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


투자자인가, 가입자인가.

홍콩 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기사를 쓰려고 노트북 자판기에 손을 얹었다가 멈칫한 적이 있다. 'ELS 투자자'라고 써야 하나, 'ELS 가입자'라고 써야 하나. 홍콩 ELS는 파상상품이고 원금손실 가능성이 있는 고위험 상품이니 당연히 투자자라고 표현해야 옳다. 그런데 총판매액 19조원 중에서 16조원이 은행에서 팔렸다. 이 말은 홍콩 ELS 투자자 대부분이 은행 고객이며 예·적금 가입자라는 뜻이 된다.



언론사들도 용어 선택이 제각각이다. 수조원대 손실이 예고되면서 지난해 연말부터 ELS 기사가 쏟아졌다. 기사에는 투자자와 가입자가 혼재돼 있다. 서울 여의도 금감원 본사에서 집단시위를 벌인 홍콩 ELS 투자자들은 용어 선택에 더 민감했다. 자신을 '투자자'가 아니라 '가입자'라고 주장했다. '투자자'라고 표현한 금감원 보도자료를 두고선 "가입자로 수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투자자와 가입자의 차이를 알 정도면 금융 지식 수준이 상당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핵심은 결국 투자자의 자기책임이 어디까지냐다. 과거 수십 년 동안 금융시장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주제다. 개인 주식투자가 시작된 1990년엔 "손실을 환불해 달라"는 주식 투자자가 있었다. 1999년 대우 부도 사태 때는 19조원에 달하는 대우채 손실에 대해 원금 보존 요구가 빗발쳤다. 2013년 은행 대출에 대한 연대보증이 폐지되기 전까지 빚보증으로 '패가망신'한 사연이 넘쳤다. 지금은 주식이나 채권에서 손실을 봤다고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다만 홍콩 ELS 사태는 돌아볼 지점이 수두룩하다. 2019년 해외 금리연계파생결합펀드(DLF) 사태로 홍역을 치르고도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돼서다. DLF 투자자 3000명 중 80대 치매 노인이 있었지만 손실액 전액을 돌려받지는 못했다. 20%의 자기책임을 물었다. DLF 사태를 계기로 금융소비자보호법이 제정돼 2021년 시행됐다. 소비자 권익증진을 위한 다양한 제도가 도입됐지만 금융회사는 "형식과 절차만 지키면 된다"는 자기 면피 수단으로 활용한 측면이 없지 않다.

금소법에는 "스스로 필요 정보와 지식을 습득해야 한다"는 소비자의 책무를 처음 포함했으나 소비자는 준비가 안 됐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자기 아내가 상당한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인데도 "몇 년 전 적금을 찾으러 갔다가 ELS 가입 권유를 받았지만 새 가슴이라 가입 못했다"는 경험담을 꺼냈다. 이해되지 않는 상품에 투자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금융소비자의 책무일 수 있다.

금감원은 이달 말쯤 홍콩 ELS 손실 배상안을 내놓는다. 금소법 이후 자기책임 범위를 얼마로 볼 것인지 '기록에 남을' 중대한 결정이 곧 내려진다. 시기는 민감하다. 4월 총선을 앞두고 40만명의 투자자를 '유권자'로 보는 정치적 시선이 큰 부담이다. 하지만 이를 의식하는 순간 노후 자금을 날린 투자자도, 과징금 위기의 금융회사도 '비싼 수업료'를 내고도 배우는 게 전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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