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바이벌이기보다 아찔한 사회실험,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4.02.09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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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오늘을 확인할 양극화 시대에 유의미한 예능

사진제공=웨이브사진제공=웨이브


“와, 진짜 저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사상검증구역’)을 보면서 수십 번은 터져 나오는 말이다. 물론 머리로는 안다. 이 지구상의 사람들은 저마다 다 다르다는 걸. 방탄소년단도 ‘70억 개의 빛으로 빛나는 70억 가지의 world’라고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서로에게 어느 정도 자신이 생각하는 보편성을 기대하게 마련이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나와 궁극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상검증구역’은 그런 믿음을 보기 좋게 깨부수며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지난 1월 26일 공개를 시작한 ‘사상검증구역’은 국내 최초로 이념 서바이벌을 표방하는 예능이다.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 4개 분야에서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진 열두 명의 출연자가 커뮤니티 하우스에서 9일간 합숙하며 하나의 공동체를 형성하는 와중 권력을 차지하고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인다. 서바이벌 예능은 대중에게 쉬이 통하는 스테디셀러 상품이지만, 출연자들의 이념과 사상, 가치관을 토대로 하는 예능은 처음이기에 신선하기 그지없다.



신선한 만큼 도발적이기도 하다. 아직도 ‘레드 콤플렉스’가 도처에 도사린 한국 사회에서, ‘수저 계급론’이 만연하고 걸핏하면 ‘성별 갈라치기’ 논란이 나올 만큼 젠더 갈등이 극심한 양극화 시대에 이런 예능은 논쟁적일 수밖에 없다. 1화에서 커뮤니티 하우스에 입소해 서로 인사하며 친근하게 저녁식사를 끝낸 입주자들을 얼어붙게 만든 주민들의 사전 정보 공개 장면이 대표적이다. ‘모든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다’라는 명제에 대해 ‘그렇다’라고 답한 사람이 2명이라고 공개되자 평화롭던 좌중은 순식간에 얼어붙는다. 그 외에도 ‘동성애는 후천적 오류다’ ‘대한민국은 남자가 역차별 받는 사회다’ ‘상속세는 더 떼어가야 한다’ ‘최저임금은 사람들을 더 나약하게 만들 뿐이다’ 등 입주자들이 사전 테스트에서 실제 찬성했던 온갖 논쟁적 명제들이 밝혀질 때마다 입주자들은 물론 지켜보는 시청자들 또한 흠칫흠칫 놀라게 된다.

사진=웨이브사진=웨이브


커뮤니티 하우스에 입주한 출연자들의 면면 또한 다채롭다. 국민의힘 소속 정치인과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치인, 미스 맥심 모델이자 아나운서, 페미니스트 활동가이자 작가, 유학파 엘리트 회사원, 특수임무단 전역 상사, 청와대 여성 경호관 출신 배우, 유튜버, 아이스하키 여성 감독, 뉴욕대 출신 래퍼, 서울대 로스쿨 출신 변호사, 빅데이터 전문가 등등. 출연자들은 본명 대신 자신이 선택한 닉네임으로 활동하지만, 출연 자체가 자신의 이념과 사상을 온 세상에 공표하는 것과 마찬가지인지라 서바이벌 프로그램 경험이 있거나 언론에 여러 차례 소개된 적 있는 인물들이 상당수다. 그럼에도 이런 콘셉트에서 이런 식으로 엮여본 적 없는 사람들의 조합이라 재미나다. 어릴 적에 쥐가 나오던 단칸방에 살던 특수임무단 전역 상사 ‘다크나이트’와 홍콩대를 나온 금수저 ‘지니’, 미스 맥심 출신 ‘슈가’와 페미니스트 작가 ‘하마’ 등 살면서 접점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 어떻게 공존하고 융화될 수 있을지 지켜보는 재미가 크다.

‘사상검증구역’의 또 다른 재미는 각기 다른 사람들이 공동체, 더 나아가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고 지도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 출연자들은 합숙 기간 동안 자신의 신념 코드와 점수를 최대한 숨기고 게임에 참여해 공동체의 상금을 적립하는데, 이 상금 분배와 탈락자 결정에 강력한 권한을 가지는 권력자 ‘리더’를 매일 투표로 선출하게 된다. 자연히 출연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세력을 형성해 스스로 리더가 되거나 내 편을 리더로 만드는 정치 행위를 하게 된다. 단순히 누가 더 권력을 쥐고 누가 더 상금을 많이 축적하는가를 넘어, 공동체 사회에서 상금은 어떻게 분배하고 공금(세금)은 어떤 비율로 징수해야 하는지 등 살아남기 위한 모든 행위 하나하나가 정치와 직결돼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게 이 프로그램의 묘미.

사진=웨이브사진=웨이브

어떤 명제가 제시될 때마다, 공동체가 어떤 난관에 직면할 때마다 입주자들이 어떤 이유로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를 보면서 ‘과연 나라면?’ 하고 대입해 보면서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것도 ‘사상검증구역’에서 얻는 효과. 이건 ‘솔로지옥’이나 ‘피지컬: 100’ 같은 예능을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시청자의 자세다. 프리지아나 덱스 뺨치게 매력적이거나 추성훈이나 장은실처럼 빼어난 피지컬을 갖고 있지 않은 이상 ‘솔로지옥’이나 ‘피지컬: 100’ 같은 프로그램에서 ‘과연 나라면?’ 하고 대입해 보긴 힘들 것이다. 그러나 ‘사상검증구역’은 그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도 한마디 거들고 싶어지는 다양한 주제와 상황을 제시하면서 시청자로 하여금 구경꾼의 자세를 벗어나 적극적인 관찰자의 자세를 취하게 만든다.

11부작 예정인 ‘사상검증구역’은 2월 8일 현재 4화까지만 공개됐지만 공개된 분량에서만 어마무시하게 많은 대화의 소재를 건질 수 있다. 심지어 연휴가 시작되는 2월 9일에는 5~8화가 한꺼번에 공개된다. 서로 다른 이념의 사람들끼리 토론과 조율 등으로 충분히 소통하고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는 프로그램의 취지에 걸맞게 이번 설 연휴에 모일 가족들과 함께 시청하는 건 어떨까 싶다. ‘엄마/아빠와는 정치 얘기 하면 싸우니까 안 해’ ‘언니/오빠랑은 도무지 말이 안 통해’ 하는 가족이라면 ‘사상검증구역’을 보면서 보다 생산적인 대화를 건져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적어도 ‘너 이번 총선 때 국힘 뽑을 거야 민주당 뽑을 거야’ 같은 ‘누구 편이야’ 단순무지한 취조 말고 ‘세금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어느 정도 선이어야 하는가’ 같은 보다 품격 있고 고차원적인 대화를 시도하는 물꼬는 되어줄 거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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