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 고급아파트의 추락…50년 넘어도 손 못 대는 이유[부릿지]

머니투데이 김효정 기자 2024.02.10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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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아파트에서는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잖아요. 여기는 한 층에 20여 세대가 한 마을처럼 살고 있어요. 낡은 건물이지만 주민들이 쉽게 떠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충무로역 앞 대로변에 있는 유난히 낡은 건물. 서울 중구 충무로 진양상가아파트다. 1970년 준공된 높이 17층, 284세대의 진양상가아파트는 1960년대 계획된 세운상가군 주상복합아파트 중 하나다.



지난달 23일 찾아간 진양아파트의 내부는 휑한 외관과 달리 아늑했다. 문을 열면 외부 공용 복도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복도식 아파트와 달리 진양아파트는 각 세대가 복도를 둘러싼 구조다. 외부 공기가 차단돼 겨울에도 복도가 춥지 않다. 세운상가와 마찬가지로 가운데가 뚫려있는 중정식 구조로 설계됐지만 1990년대 낙하사고가 발생한 이후 공간을 막았다.

한 층에 있는 20여 가구의 출입문이 각기 다른 모양인 것도 특징이다. 낡은 아파트인 만큼 리모델링을 거칠 때마다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으로 문을 바꾼 탓이다. 외부로 난 창이 한쪽밖에 없는 구조상 여름에는 맞바람이 통하도록 각기 다른 현관문을 열고 지내기도 한다.



평형은 전용 71㎡~239㎡까지 다양하다. 대형 평수는 여러 가구를 터서 만든 세대다. 진양상가 인근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는 "내부의 큰 기둥만 건들지 않으면 구조를 변경할 수 있어서 가구별로 방 개수가 다르기도 하고 두 채를 터서 한 가구로 만든 집도 있다"고 말했다.

진양아파트가 설계된 1960년대 당시 17층은 고층 건물이었다. 헬기장까지 있는 건물 옥상에 올라가면 청계천까지 이어지는 세운지구가 한눈에 보인다.
서울 한복판 고급아파트의 추락…50년 넘어도 손 못 대는 이유[부릿지]


세운지구는 일제강점기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였다. 공습으로 인한 피해가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둔 땅을 의미한다. 광복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일대는 피난민들이 정착한 무허가 판자촌이 됐다.

1966년 부임한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은 곧바로 판자촌 철거에 나섰다. 이후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를 바탕으로 4개 지구에 8개 건물로 구성된 주상복합타운 세운상가를 조성했다.


김수근은 3층 높이에서 남북 약 1㎞의 거리를 연결하는 공중보행로, 상가 층과 주거 층을 구분하는 인공대지, 건물을 덮는 채광창(아트리움) 등을 설계도에 적용했다. 8개 건물군이 하나의 도시 역할을 하도록 각 지구에 동사무소와 파출소, 우체국 등을 배치하고 옥상에는 초등학교를 세우겠다는 계획도 했다. 그러나 공사가 진행되면서 이 계획들은 전부 무산됐다.

서울의 '명물'로 주목받았던 세운상가는 10년도 채 되지 않아 서울의 '괴물'로 전락했다. 용산전자상가가 건설되면서 상권이 죽었고 강남과 한강변을 중심으로 고급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주민들도 떠났다. 서울 한복판에 들어선 대형 건물군은 흉물이 됐다. 197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을 총괄한 고(故) 손정목 교수는 세운상가를 '김수근 일생일대의 실수'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고위 관료, 영화배우 등이 거주하는 고급주거지였던 진양아파트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후 재건축 논의가 여러 번 있었지만 실현되진 않았다. 현재 진양아파트 용적률은 1400%를 웃돈다. 현실적으로 재건축이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오세훈 서울시장은 지난해 10월 세운지구 일대를 재개발하는 재정비계획안을 내놨다. 세운상가부터 진양상가까지 7개 건물을 단계적으로 철거해 녹지축을 만들고 축 양옆에 초고층 주거·업무시설을 세운다는 구상이다.

오 시장은 첫 재임 시절인 2007년에도 세운지구 공원화를 추진했다. 8개 건물 중 하나였던 현대상가는 당시 철거됐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고 박원순 시장이 재임하면서 사업이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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