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릴에 진심인 영파씨, 정체성을 구축해나가는 방법

머니투데이 이덕행 기자 ize 기자 2024.02.07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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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DSP/사진=DSP


가요계에 패기 있게 도전장을 내민 아이돌 그룹에게 가장 중요한 건 그룹만의 색을 보여주는 것이다. 청량, 섹시함 등 콘셉트를 중심으로 음악을 전개할 수도 있고 힙합, 밴드사운드, 아카펠라 등 음악적 장르를 먼저 정해놓고 이미지를 펼칠 수도 있다. 최근에는 '00 팝' 처럼 자신들의 새로운 음악을 정의하고 그에 맞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룹도 있다. 지난해 10월 데뷔한 영파씨는 음악적인 장르를 통해 자신들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는 쪽에 가깝다. 그들이 추구하는 음악 장르는 힙합이다. 그중에서도 힙합의 하위 장르인 '드릴'에 대한 진심이 인상적이다.

영파씨는 지난 4일 디지털싱글 '영 파씨 업'(YOUNG POSSE UP)을 발매했다. 데뷔 EP 'MACARONI CHEESE'(마카로니 치즈) 이후 약 4개월 만의 신곡이다. '영 파씨 업'은 데뷔 앨범의 첫 트랙 'POSSE UP!'을 리믹스한 곡이다. 멤버들이 직접 쓴 가사와 멜로디는 그대로 담겨있지만 버벌진트, NSW yoon, Token이 피처링으로 합류해 곡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영파씨는 핑클, 카라, 레인보우, 에이프릴 등을 론칭했던 DSP 미디어에서 8년 만에 선보인 걸그룹이다. 가장 최근에 선보였던 에이프릴이 청정함을 지향했고, 16.6세라는 평균나이, 이에 걸맞은 귀여운 앨범 커버와 '마카로니 치즈'라는 앨범 타이틀 등 베일을 벗기 전의 영파씨는 기존의 걸그룹과 비교해 큰 특색을 느끼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나 음악이 공개되자 이런 느낌은 곧바로 사라졌다. 특히 타이틀곡 '마카로니 치즈'와 '파씨업'은 제대로 된 힙합 감성을 담아내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 중 '파씨업'은 드릴 장르에 대한 깊은 이해도가 돋보였다. 2020년 전후로 전 세계 힙합신을 강타한 드릴은 국내에도 많이 전파됐고 2022년 방송된 '쇼미더머니11'에서도 드릴을 기반으로 한 래퍼들이 다수 참여하기도 했다. 이는 K팝으로도 확장되어 스테이씨(I want u baby), 엔하이픈(Future Perfect), 스트레이 키즈(3RACHA), 몬스타엑스(춤사위) 등이 드릴 기반의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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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드릴 사운드가 주는 청각적 쾌감에 더 집중한 다른 곡들과 달리 '파씨 업'은 "갱처럼 썼던 마스크 안엔 Barbie" "핑크색을 입은 rambo 총구에선 fire rainbow" 등의 가사를 통해 드릴 장르가 가진 가사적 특성까지 담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장르를 무작정 카피한 것은 아니다. 높은 폭력성이 특징인 드릴 장르의 가사를 미성년자인 영파씨 멤버들이 쓰는 건 오히려 어색할 수 있다. 장르의 특징을 담은 가사는 포인트로 남겨두되, 멤버들이 직접 쓴 가사를 통해 진정성을 더했다.

"Rap 배운 지 딱 두 달 가사쓰기 참 어렵구나 80억의 인구가 살고 있다하네 지구만


너무 크네 우주가 난 그냥 작은 먼지일 뿐야 먼지 같은 내가 배운 언어로 랩하면 너는 들어줄까"

이렇게 '파씨업'의 가사는 아이돌 데뷔앨범에 실릴 수 있는 내용인가 싶다가도, 적어도 멤버들의 진심만은 확인할 수 있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무엇이 힙합인가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자신들의 고민과 생각을 직접 가사로 담아낸 영파씨의 모습이 힙합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4개월 만의 컴백에서 신곡을 발매하는 것이 아닌 '파씨업'을 다시 한번 리믹스했다는 것도 이 노래에 대한 이들의 진심을 알 수 있다. 복면을 쓴 멤버들이 등장하는 앨범 커버나 뮤직비디오 역시 드릴이라는 장르를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룹의 프로듀싱을 담당하는 키겐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영파씨는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천천히 구축해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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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아직 고민해야 할 지점이 남아있다. 멤버들의 발성과 톤, 랩스킬등에 대한 부분은 논의 대상이 아니다. 충분히 트레이닝을 통해 개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파씨가 단순히 인디펜턴트 아티스트가 아닌 아이돌이라는 점에 더 주목해야 한다. 장르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를 기반한 아이돌이라는 포지션은 분명 희귀하다. 하지만 장르 음악과 대중 음악 사이에서의 밸런스, 대중성과 팬덤 사이에서 어떻게 소구점을 찾을지에 대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많은 비용이 투자되는 아이돌 산업의 특성상 수익이 동반되지 못한다면 어떤 아이덴티티를 구축하더라도 실패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아티스트 스스로도, 회사 차원에서도 고민해야 할 지점이 많이 있지만 '씬을 먹은 다음에 밤새 링고 아메, 초코프라메, 애플 캬라멜, 크레페, 라멘을 먹겠다'고 외치는 영파씨의 패기는 걱정보다는 기대를 갖게 한다. 자신들만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한 영파씨는 지금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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