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녀라는 환상[우보세]

머니투데이 정현수 기자 2024.01.29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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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는 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가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영국 히스로 공항에서 런던까지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직행열차 탑승이다. 약 15분이면 시내로 갈 수 있다. 하지만 편도 요금만 25유로(약 3만6000원)다. 런던 관문에서부터 영국의 어마어마한 물가를 체감할 수 있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15세 미만 어린이와 청소년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된다. 나이 외의 조건은 없다. 아이들이라면 그냥 공짜다. 부모 입장에선 그만큼 부담을 덜 수 있다.

한국의 정책 담당자가 이를 벤치마킹했다면 어땠을까. 한국에선 다자녀 가구에 혜택을 주자고 했을지 모른다. 실제로 한국의 공항 주차장은 2자녀 이상 가구에 '반값 주차비' 혜택을 제공한다. KTX 요금도 2자녀 이상이면 추가 할인을 받는다. 자녀가 한 명이라면 기본적인 어린이 할인 혜택만 주어진다. 인천공항과 서울역을 연결하는 직통열차의 요금은 어른 1만1000원, 어린이 8000원이다.



다자녀 혜택은 대표적인 저출산 정책으로 꼽힌다. 출발점은 제1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2006~2010년)이다. 5년 단위의 이 계획에서 조세와 사회보험, 주거안정지원 등을 중심으로 다자녀 지원정책이 시작됐다. 다자녀의 기준은 통상 3자녀 이상이다. 정책별로, 지역별로 조금씩 기준이 달랐지만 대체로 그랬다. 그러다 지난해부터 다자녀 기준이 2명 이상으로 바뀌었다.

다자녀를 우대한 정책의 방향은 명확했다. 여러 명의 아이를 낳으면 혜택을 줄테니 아이를 더 낳으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자녀를 우대하는 인구정책은 실패했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자녀를 중심으로 인구정책을 마련했지만 저출생 상황은 더 심해졌다. 자녀수 역시 늘지 않았다. 통계청 인구총조사를 보면 미성년자 자녀가 있는 가구 중에서 3자녀 이상의 비율은 2017년 10.4%에서 2022년 9.7%로 줄었다.



그 이유는 명확하다. 정책 내용이나 방향이 잘못됐기 때문이다. 먼저 정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혜택의 체감도가 높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다자녀 혜택 중 가장 큰 주택특별공급의 대상은 무주택자다. 국가장학금은 소득을 따진다. 다자녀 혜택이 클수록 문턱이 높았다. 정책 효과가 크게 나타날 수 없는 구조인 셈이다. 그 외의 다자녀 혜택도 '아이를 더 낳을 결심'에 이를 만큼 파격적이지 않았다.

가령 철도운임과 공항주차장 요금 할인은 일상생활과 무관한 이벤트성 혜택이다. 일상생활과 맞닿아 있는 전기요금 할인은 한도가 월 최대 1만6000원이다. 그나마 3자녀 이상을 다자녀로 인정한다. 다자녀 가구의 어려움을 소소하게 지원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응원할 만하지만, 이런 혜택만 보고 아이를 더 낳을 결심을 할 사람은 많지 않다.

정책 방향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초저출산 시대에 들어서며 무자녀 가구가 흔해졌다. 영유아 자녀가 있는 가구 중 자녀 1명만 있는 가구는 2022년 기준으로 50%에 육박한다. 다자녀에 초점이 맞춰진 정책의 에너지를 무자녀와 1자녀 가구에 좀 더 쏟아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다자녀 혜택의 체감도를 더 높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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