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가 들어오겠냐"…진짜 들어왔다, 219석 보수 여당 만든 합당[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미루 기자 2024.01.22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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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월22일 3당 합당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90년 1월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합의 기자회견 장면. /사진=대한뉴스 1785호 갈무리1990년 1월22일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 합의 기자회견 장면. /사진=대한뉴스 1785호 갈무리


"야 그거 되지도 않는 얘기를 하냐. JP는 모르지만 YS나 DJ가 민정당에 들어오겠나?" -노태우 발언 회상(당시 대통령비서실 박철언 정책보좌관 증언)



노태우의 짐작은 반쯤 기우였다. 1990년 1월22일,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는 노태우 대통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총재와 함께 '3당 합당'을 발표했다. 민주운동가였던 김영삼이 적과 손을 잡는 셈이었다. 그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노태우가 가장 먼저 손을 내민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는 불참했다. "국민이 만든 여소야대가 불편하다고 바꾸려 하면 안 된다. 당신도 불행해지고 나라도 불행해지는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유일한 원내 야당으로 남았다. '1노 3김'(노태우·김대중·김영삼·김종필) 4자 구도가 순식간에 '호남·비호남' 구도로 단순화됐다는 평가도 있다.



1988년 13대 총선으로 탄생한 여소야대 정국은 이렇듯 3당 합당 선언으로 사실상 막을 내렸다.

13대 총선, 최초 여소야대…전두환 국회 불렀다
1989년 12월31일 전두환이 증인으로 나온 '제5공화국 청문회'. 최초의 여소야대 제13대 국회는 제5공화국 비리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를 위해 헌정사상 최초로 청문회를 개최했다. /사진=국회방송 갈무리1989년 12월31일 전두환이 증인으로 나온 '제5공화국 청문회'. 최초의 여소야대 제13대 국회는 제5공화국 비리와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조사를 위해 헌정사상 최초로 청문회를 개최했다. /사진=국회방송 갈무리
1987년 6월 항쟁 전후 한국 정치에는 군사독재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대결 구도가 작용했다. 같은 해 12월16일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민주화 세력의 승리로 점쳐졌지만 김대중과 김영삼이 통합하지 않으면서 노태우가 당선됐다.

이듬해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는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냈다. 노태우의 민정당은 원내 1당 자리를 지켰지만 전체 299석 중 과반수에 못 미치는 125석을 얻었다. 반면 김대중의 평민당은 70석, 김영삼의 민주당은 59석, 김종필의 공화당은 35석을 가져가며 3개 야당이 164석을 차지했다.


여소야대 상황은 정치에 변화를 만들어냈다. 집권 여당이 독식하던 국회부의장과 상임위원장을 정당 의석수대로 분배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법률, 예산의 심사와 통과도 여야 4개 정당의 협상으로 처리됐다. 전두환의 권력형 비리를 둘러싸고 국회 청문회가 생중계되면서 전 국민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었다. 특히 전두환이 증인으로 나온 5공화국 청문회 생중계 시청률은 81%까지 치솟았다.

이 시기에 김대중이 5공화국 비리 문제, 광주민주화운동 문제 등 처리를 대가로 노태우 정부에 대한 중간평가 실시 유보에 합의하며 여당을 지원한 사실도 훗날 드러났다. 반면 김영삼은 중간평가 실시를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야 3당 사이에 의견 차이가 존재할 수 있고 특정 야당을 배제한 채 다른 야당과 여당이 소통할 수 있었다는 방증이다.

노태우 대통령 본인도 이를 알고 있었다. 그는 13대 국회 개원 연설에서 "수적 우위에 의한 집권당의 독주가 허용되던 시대도, 소수당의 무조건 반대와 투쟁의 정치가 정당화되던 시대도 지났다"고 말했다. '물태우'로 불리며 국정운영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상황이 이어졌다.

"이의 없습니까" 총재에…"이의 있습니다" 손든 초선 의원

1990년 1월30일 3당합당 결의 임시전당대회에 참석해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합니다" 외치는 당시 노무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과 김상현 의원. /사진=노무현사료관 갈무리(김종구 기자 촬영)1990년 1월30일 3당합당 결의 임시전당대회에 참석해 "이의 있습니다. 반대토론 해야합니다" 외치는 당시 노무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과 김상현 의원. /사진=노무현사료관 갈무리(김종구 기자 촬영)
1990년 1월22일, 노태우 대통령은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3당을 합쳤다.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합당한다. 299석 중 219석의 초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국민의힘 전신이다.

강원택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3당 합당과 한국 정당 정치'라는 자신의 논문에서 "여소야대의 상황 속에 어려움을 겪던 노태우 대통령과 차기 대권에서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자 한 김영삼, 소수 정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집권 세력에 참여하려 한 김종필의 욕구가 일치점을 찾은 결과"라고 설명했다.

통일민주당 안에는 합당 반대파가 나타났다. 이때 김영삼은 노무현을 두고 '어차피 동참 안 할 사람'이라며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당 해체를 결의하는 임시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이의 없습니까. 이의가 없으므로 통과됐음을…"이라고 말하는 순간 객석에서 초선 의원에 불과했던 노무현이 일어나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해야 합니다. 토론과 설득이 없는 회의가 어디 있습니까"라고 말한 장면은 유명하다. 3당 합당은 노무현이라는 정치 영웅의 탄생을 불러온 사건이기도 했다.

사후 출간된 노무현 자서전에는 "한때 내 영웅이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일그러진 영웅이 되고 말았다"며 "그가 만든 기회주의 정치문화와 대결해야만 했다"고 적혔다.

통일민주당 내 합당 거부파 의원들은 무소속 의원과 함께 8명으로 구성된 '민주당'(속칭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3당 합당으로 소수 야당이 된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은 일부를 영입해 신민주연합당으로 태어났다. 두 정당 모두 1991년 지방선거에서 크게 진 뒤 1991년 9월 '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합당한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으로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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