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게 느껴졌던, 주위에 없는 것 같았던, 98세 참전용사 김성춘 선생님을 꼭 안아드렸다. 목숨을 걸고 6·25 전쟁에 참전해 나라를 지켰단 것. 그에 감사를 표하는 건 처음이었다./사진=라미 현 작가
근황을 물으니, 요즘은 참전용사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야길 듣는단다. 이른바, '참전용사, 마실 가다' 프로젝트다. 마실, 이웃에 놀러다니는 일. 참전용사라면 어쩐지 조금은 멀고, 약간은 딱딱하게 느껴지는데, 어떤 걸지 궁금했다. 라미 작가가 말했다.
참전용사를 가끔 봤었다. 종로 거리를 걷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짚은 채 꼿꼿히 걸었던 할아버지. 예의를 표하고 싶었으나 어쩐지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아 쭈뼛거렸다. 그런데 고맙게도 이리 멍석을 깔아준 이가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희귀한 공군 참전 용사 김성춘 대령(98)…"비행기 정비했는데, 구멍이 뻥뻥 났지요"
공군 비행기 정비사였던 김성춘 선생님의 젊은 시절./사진=남형도 기자
김성춘 선생님. 1926년생, 98세. 6·25 전쟁서 나라를 지킨 참전용사. 고향은 경기도 화성군(당시 수원군) 장안면 사량리. 정찰대 비행대대 소속 항공기 정비사였고, 전투비행단에선 조종 교관으로 근무했단다. 충무 무공훈장 2개,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가르마를 곱게 탄 노장은 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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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니다 보면 선생님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 많이 없으시지 않으세요?"(캡틴따거)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은, 나 아는 사람 중엔 없어. 다 죽었어요."(김성춘 선생님)
라미 현 작가가 '프로젝트 솔져' 2024년 달력을 선물했다. 전 세계의 한국전쟁 참전용사들을 찍은 사진으로 만들었다. 왼쪽에 앉아 있는 김성춘 선생님./사진=남형도 기자
난 녹음기를 켰고, 라미 작가와 정 PD는 영상을 찍었다. 기록이 시작됐다.
"1950년 6월 24일에, 고향에 가서 1박을 했지요. 6월 25일 오전 9시엔 수원역에 왔어요. 육군 수십 명이 완전 군장으로 기차에 탔지요.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대거 침입해 막으러 간다'고 하더라고요."
받은 훈장들을 라미 작가에게 설명하는 김 선생님./사진=남형도 기자
단골 중식당에서의 점심 식사…"모자 쓰고 다니면 감사하다고, 고맙지요"
김 선생님의 단골 중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먹었다. 라미 작가(왼쪽)와 김 선생님, 유튜버 캡틴따거 문신호씨(오른쪽)./사진=남형도 기자
간발의 차로 고사포에 맞을 수도, 그래서 추락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었던 이야기. 오랜 세월이 흐른 끝에 덤덤하게 들려주었으나, 상상하니 압도됐다. 김 선생님 이야기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어느덧 점심을 먹을 때가 됐다.
김 선생님의 단골 중식당으로 향했다. 겉옷은 괜찮단 노장에게, 추우니까 입으시라고 권했다. 지팡이를 짚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겼다. 불편함이 없게 미리 문을 열고, 엘리베이터를 잡고, 천천히 기다려주었다.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 여러 이야길 더 들었다. 전쟁에서의 주요 전투나, 어떤 수치엔 담기지 않았던, 생생한 증언이었다.
지팡이와 계단 손잡이에 의지해 한 걸음, 한 걸음 옮겨야할만큼, 참전용사는 연세가 많이 들었다./사진=남형도 기자
대공포가 올라오고, 좌우로 선회를 하며 피하고, 그 과정에서 비행기가 추락해 전우를 잃는 경우도 허다했다. 다른 정비 기장이 정찰을 한 번 다녀온 뒤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해서, 김 선생님이 대신 가기도 했다.
탕수육과 깐쇼 새우와 양장피가 조금씩 나왔고, 이어 짜장면과 기스면을 먹었다. 깔끔하고 맛있었던, 참전용사와의 한 끼였다. 라미 작가가 대접하고 싶다며 계산했다. 참전용사에 대한 고마움. 그걸 평소 시민들에게도 듣느냐고 물었다.
"모자를 쓰고 다니면 돈을 안 받는단 분도 있고, 감사하다고 많이 듣지요."(김 선생님)
"그럴 땐 기분이 어떠신가요, 선생님."(기자)
"기분이 아주 좋지요, 하하."(김 선생님)
"세뱃돈 줘야지"…"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
참전용사의 서재에서 찍은, 김성춘 선생님의 사진. 서예와 그림을 즐겨 그린다고 했다./사진=라미 현 작가
"서예 족자를 몇 개 더 꺼내볼까요. 선생님은 여기에 앉아 계시고요. 여긴 뭐가 좋을까. 그림 이것도 괜찮은데요. 여기엔 뭐가 어울릴까. 저 액자 좀 가져다주세요. 이건 세워볼게요. 아니다,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빛이 들어온 느낌이 더 나을까. 모자는 여기 위에 올리시고요."
"내면까지 담아낸 사진이거든요. 자기 모습을 보며 '내가 참전용사였구나, 겁쟁이가 아녔구나', 그리 느끼는 거예요. 한국전쟁서 싸운 게 잘한 거였다고요. 라미 현 작가의 말이다./사진=남형도 기자
신년이라 세배를 했다. 나와 라미 작가, 캡틴따거 문신호씨가 나란히 섰다. 절하며 이리 말했다.
"나라를 지켜주셔서 고맙습니다." 참전용사에게 처음 세배를 했다./사진=라미 현 작가
"새해 복 많이 받아요. 고맙습니다. 여러가지로 애를 많이 써주셔서요. 세뱃돈을 줘야지."(김 선생님)
"괜찮습니다, 선생님.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문신호씨)
헤어지기 전엔 참전용사를 꼭 안았다. 노장은 작지만 따뜻했고, 여전히 단단했다. 우리에게 연신 고맙다며, 지하 주차장까지 마중을 나왔다. 돌아가는 길에 라미 작가가 말했다.
"우린 이제까지 선생님 같은 분들을 TV나 행사에서 바라만 봤거든요. 그냥 가까이 다가와서 밥 한 끼, 먹으면서 그런 얘기 듣는 게 재밌어요. 6·25 참전용사라 하면 어렵게 생각하는데 사실 가깝게 있거든요. 한 번, 두 번 만나보면 별 것 아니구나, 그냥 하면 되는구나 생각하게 되지요."
정말 그런 마음이었고 또 오겠다고 했다. 다른 참전용사와의 마실에도.
"다가가서 그냥 '감사합니다' 한 마디 하면 되는데, 무섭고 떨리고 싫어하지 않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거지요." 라미 현 작가 덕분에 그 경계를 넘었고, 연결될 수 있었다. 처음으로./사진=라미 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