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일본이 받아든 반도체 성적표다. 30년전의 영광은 간데없다. 그런 일본에 삼성전자 (74,300원 ▼1,600 -2.11%)가 첨단 반도체 연구개발 거점 둥지를 튼다. 400억엔(약 3600억원) 이상을 들여 일본 요코하마에 반도체 패키지 중점의 연구개발 거점을 신설하기로 했다. 반도체 생산기반이 취약한 일본이 1등만 고집하는 삼성을 끌어들인 비결은 무엇일까. 여전하고도 확실한 무기, 소부장(소재·부품·장비)이다.
일본, 소재·장비 모두 갖춘 반도체 강국일본은 전세계 반도체 소부장 핵심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용 포토레지스트가 있다. 웨이퍼 위에 바른 포토레지스트에 EUV 빛이 닿으면 회로 모양으로 변한다. 5나노미터(㎚: 1㎚=10억분의 1m)이하 첨단 파운드리(시스템반도체 위탁생산) 공정에 필수적으로, 포토레지스트 공급이 끊기면 반도체 공장을 돌릴 수 없다. 일본이 2019년 수출규제한 3개 품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글로벌 포토레지스트 시장의 90% 이상을 JSR과 스미토모화학 등 일본 기업이 차지한다.
특히 일본의 소부장은 반도체 전공정(반도체를 설계하고 웨이퍼에 회로를 새겨 잘라내는 과정)뿐만 아니라 첨단 패키징(조립) 중심의 후공정(반도체를 전자제품에 탑재하기 위한 테스트와 패키징 과정)에도 강점을 가진다. 이비덴과 신코가 각각 첨단 기판 분야 세계 1위, 2위다. 기판에 사용되는 대표 소재인 마이크로 필름 ABF는 아지노모토가 독점하고 있다. ABF라는 명칭마저 기업명을 딴 '아지노모토 빌드업 필름'이다. 회로 간섭없이 전류를 흐르게 한다. 후공정 반도체 장비 시장에서 일본이 차지하는 글로절 점유율은 44%에 달한다. 2022년 매출 기준 반도체 장비회사 글로벌 톱10 가운데 4곳이 일본 회사다.
반도체 미세화 공정이 한계에 다다르면서 전공정 못지 않게 후공정 중요성이 커졌다. 반도체 집적도가 24개월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첨단 패키지 기술이 회로 미세화 공정의 대안으로 떠올랐다. 예를 들어 3D 패키징 등 칩을 수직으로 쌓아 기존의 수평 방식보다 효율적으로 배치해 디바이스 성능 강화를 돕는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는 "5G와 AI(인공지능) 등 미래 디지털 사회에선 고속 컴퓨팅 반도체 수요가 높아지는데, 이 반도체 진화를 실현하는 것이 3차원 패키징 기술"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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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의 R&D(연구개발)협력은 삼성전자의 첨단 패키징 기술 개발 역량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일본엔 패키지 절단과 조립, 감광재 등 고도의 요소 기술력을 가진 기업이 다수 위치해 있다. 미세 가공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신소재를 개발하거나 가공방법의 정교성을 한층 끌어올리는 데에 일본의 선진 기초 기술과 장비를 활용할 수 있다.
LG경영연구원에서 30년이 넘게 일본 경제를 연구해 온 일본통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삼성전자가 소부장 기업이 많고, 연구체제가 갖춰져 있는 일본에 연구소를 세우기로 한 것은 한계에 부딪힌 삼성전자의 미세가공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신소재 개발과 기초기술 등 과학 연구 측면에서 일본이 강점이 있는만큼 특히 차세대 패키징 기술 분야에서 한일 협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일본 역시 반도체 산업 재부흥의 지렛대로 소부장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공급망 강화 측면에서 전세계 반도체 유수 기업들을 유치해야 하는데, 이들을 유인할 수 있는 경쟁력이 되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2021년부터 반도체 재부흥 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한 후 삼성전자와 파운드리 경쟁자인 대만의 TSMC까지, 반도체 빅2의 '후공정' R&D 투자를 모두 이끌어냈다. TSMC는 2022년부터 일본 이바라키현 쓰쿠바시에서 후공정 반도체 연구개발센터를 운영 중이다. 삼성전자의 투자를 두고도 NHK는 "일본 정부가 공급망 강화 측면에서 해외 반도체 업체들의 국내 진출을 촉구하고 있다"고 했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일본 기업의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삼성전자, TSMC와의 협력만으로도 일본 소부장 기업들은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목을 이끌 수 있다. 빅2와의 협력이 곧 '우수'인증 마크가 되는 셈이다. 일본은 후공정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발판삼아 반도체 산업 전반의 경쟁력 회복을 이루겠다는 전략이다. 안기현 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일본이 삼성전자에 (소부장을) 팔면, 다른데에도 팔 수 있다.삼성전자는 제일 좋은것만 사니까"라며 "한국이 써주면 반대로 일본도 개발 능력이 좋아지니 윈윈인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일본 소부장 기업간의 협력을 필두로 한일 반도체 동맹은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앞서 정부도 경기도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 일본 소부장 기업을 대거 유치하겠다고 했다. 황철성 서울대 재료공학부 석좌교수(전 서울대 반도체 공동연구소장)은 한일 반도체 협력에 관해 "여전히 필요하고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론 한국이 소부장 국산화를 진행 중이고, 일본도 반도체 자체 생산을 목표로 하는 만큼 동맹도 유한할 수 밖에 없다. 안 전무는 "그렇다고 무한대로 계속 협력하는 것은 아니다"며 "결국 제일 좋은 것은 국내 업체에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