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 재편한 '탈냉전의 설계자'…100세 타계, 키신저는 누구?

머니투데이 박가영 기자 2023.11.3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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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AFPBBNews=뉴스1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 /AFPBBNews=뉴스1


"미국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오직 국익만이 존재할 뿐이다."

외교계의 살아있는 전설로 불린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부 장관이 29일(현지시간) 10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키신저 전 장관의 외교 컨설팅사 '키신저 어소시어츠'는 이날 "존경받는 미국인 학자이자 정치인 키신저가 29일 코네티컷 켄트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시한 그는 현실주의에 기반한 외교 정책으로 현대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키신저가 '외교의 거장'으로 불린 이유
키신저 전 장관은 1970년대 미국 외교정책의 대명사였다. 하버드대 교수로 재직하며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린든 존슨 대통령의 고문으로 임명돼 영향력을 발휘하던 그는 1969년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되며 백악관에 입성했다. 이어 1973년에는 제56대 국무장관으로도 임명됐다. 외교·안보 '투톱'인 국무장관과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을 동시에 거머쥔 건 지금까진 키신저 전 장관이 유일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힘의 균형'이 평화의 전제 조건이라 강조해왔다. 이를 기반으로 냉전 시대 동서 진영 간 데탕트(긴장완화)를 끌어냈다. 중국의' 죽(竹)의 장막'을 거둔 건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꼽힌다. 키신저 전 장관은 1971년 미국 탁구팀이 중국을 방문하는 '핑퐁 외교'를 주도, 양국 교류의 물꼬를 텄다. 그는 이어 같은 해 7월 극비로 중국을 방문했고, 1972년 2월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이 중국을 찾아 마오쩌둥 당시 국가주석을 만났다. 두 정상은 '상하이 코뮈니케'에 서명했고, 이는 1979년 공식 수교의 발판이 됐다.



키신저 전 장관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졌다. /AFPBBNews=뉴스1키신저 전 장관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7월 베이징에서 회담을 가졌다. /AFPBBNews=뉴스1
키신저 전 장관은 1972년에 미국과 소련 간 공격용 전략미사일 수를 동결하는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성사시켰다. 이듬해엔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를 오가며 갈등을 중재하기도 했다. '셔틀 외교'라는 말도 이때 생겨났다.

그는 베트남전 종전에도 관여했다. 1973년 1월 프랑스 파리에서 북베트남 정부와 회담을 갖고 미군 철수와 평화정착기구 설치를 골자로 한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이 공로로 베트남 협상 대표인 레둑토와 함께 같은 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키신저 전 장관은 한반도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1975년 유엔총회에서 중국과 소련이 남한을 승인하고, 미국과 일본이 북한을 승인하는 '교차 승인'과 두 나라의 유엔 동시 가입을 제안했다. 남과 북을 유엔이라는 국제무대로 끌어들여 한반도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북한이 이를 영구 분단을 위한 획책이라며 반대하고 나서면서 무산됐다. 1973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일본 도쿄 납치사건 당시 김 전 대통령 구명 조치에 나선 일화도 유명하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김 전 대통령을 비롯, 현직에 있던 노태우·김영삼· 노무현·이명박·박근혜 대통령과 만났다.


키신저 전 장관은 민주당의 지미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자 장관직을 내려놨다. 이후 컬럼비아대, 조지워싱턴대 교수를 지내며 저술 및 연구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와 조지 H.W. 부시 행정부에서는 외교정보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이던 2016년 11월 키신저 전 장관을 트럼프타워로 초청해 외교정책에 대한 조언을 구했다. 뉴욕타임스(NYT)는 "키신저 전 장관은 케네디 대통령부터 조 바이든 대통령까지 미국 역대 대통령의 4분의 1이 넘는 12명의 대통령에게 조언자 역할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최근까지도 활발한 대외 활동을 이어왔다. 100세인 올해 7월에는 중국을 깜짝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회담했다. 당시 시 주석은 "우리는 라오펑유(老朋友·오랜 친구)를 잊을 수 없으며 당신이 중·미 관계의 발전과 중·미 양국 국민의 우의 증진을 추동한 역사적 공헌을 잊을 수 없다"며 그를 극진히 예우했다.



197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 중인 키신저 전 장관/AFPBBNews=뉴스11973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연설 중인 키신저 전 장관/AFPBBNews=뉴스1
키신저의 그늘
명이 있으면 암도 있는 법. 키신저 전 장관이 철저히 미국의 국익만을 중시하고 민주적 가치를 짓밟았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그는 1970~1980년대 남미 군사정권들이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기 위해 수행한 '콘도르 작전'의 배후로 알려져 있다. 콘도르 작전은 미국의 지원을 받은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우루과이 등의 군사정권이 암살, 고문, 살인 등을 일삼으며 정권 유지를 위해 벌인 정치적 탄압 행위를 말한다.

칠레의 쿠데타를 부추긴 핵심 주동자이기도 했다. 1970년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 대통령이 당선되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의 쿠데타를 지원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권을 무너뜨렸다. 1974년 대통령에 취임한 피노체트는 훗날 칠레 역사상 최악의 군부 독재자로 기록됐다. 또 베트남전 때 캄보디아의 비밀 폭격을 주도해 수만 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낸 바 있다. 버니 샌더스 미 상원의원은 2016년 대권 도전 당시 캄보디아 사건을 언급하며 "나는 키신저가 미국 역사상 가장 해악을 끼친 국무장관 중 한 명이었다고 본다"고 그를 비난하기도 했다.

NYT는 "키신저만큼 칭송과 비난을 동시에 받은 외교관은 없다. 미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국제질서를 재편한 현실주의자로 칭송받기도 하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면 인권을 중시하는 미국의 가치도 내버린 인물이라는 비난도 받았다 "며 "미국 현대사에서 키신저만큼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한 인물은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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