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화진칼럼]'이사회 경영'의 한국적 의미

머니투데이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2023.11.19 1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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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주식회사의 이사회는 크게 두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가 투명경영과 윤리경영을 담보하는 것이다. 둘째는 경영진의 경영 판단을 점검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이사회 경영이 부각되는 것은 주로 첫 번째 때문이다. 20세기 고도성장기에 국내 대기업에서는 소유가 집중되어서 이른바 '오너 경영'이 이루어졌는데 오너 경영은 추진력과 책임감이 뛰어나지만 투명성이 부족했다. 창업자가 개인 기업으로 출발한 회사를 급속도로 성장시킬 때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기업 규모가 커지고 외국인 포함 일반 주주 비중이 늘어나면서 투명성의 결여는 한국 기업의 큰 약점으로 부각되었다. 이사회 경영은 그에 대한 처방으로 여겨진다.



문제는 두 번째다. 1960년에 제정된 상법은 처음부터 주식회사의 경영을 이사회에 맡겼다. 상법은 '경영자'나 '경영진'이라는 개념을 모른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회의체인 이사회가 기업을 경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과거 이사회는 오너 경영자와 고위 임원들이 모이는 경영위원회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시대 한국 기업의 이사회는 사외이사라는 개념을 몰랐고 그냥 임원 회의였다. 삼성전자 이사회가 50명이 넘는 규모로 구성되었어도 이사회의 회사 경영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새로운 시대가 왔다. 1997년을 전후해서 외부인인 사외이사가 기업의 이사회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다수가 사외이사여야 된다고 한다. 사외이사 제도의 확산은 한국 기업들이 과거 가지고 있던 투명경영 차원의 취약점을 보강해주는 역할을 한다. 대체로 미국에서 발달한 제도를 수입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사외이사들이 회사의 경영 판단에도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는 사실 예기치 못한 전개다. 아무도 현재 규모와 수준의 한국 기업들에서 사외이사들이 경영 판단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경영진의 판단을 사후적으로 검토하고 승인하는 역할은 할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다. 사외이사에게는 전문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문성이라 함은 각자 고유영역의 전문성이 아니라 회사의 사업에 관한 전문성이다. 갑자기 일정 기간 회사의 사업을 들여다보게 된 사외이사가 수십 년간 회사의 다양한 사업 분야를 거친 사내이사들의 경영 판단에 버금가는 혜안을 보이기는 어렵다. 국내에서 이사회의 역할에 관한 다소의 혼동이 생긴 이유는 미국 기업 이사회의 구성과 한국 기업 이사회의 구성이 많이 달라서다.

예컨대 미국 디즈니는 11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운영한다. 로버트 아이거 회장 외에 전원이 사외이사다. 나이키 회장, GM 회장, 오라클 사장 3명이 현직 경영자고 그 외 7명 모두 전직 대기업 경영자다. 반대로 우리는 기업이 아닌 여러 분야에서 오랫동안 경력을 쌓고 전문가가 된 인사들을 사외이사로 영입한다. 미국의 경영자 출신 사외이사들은 경영 판단에 큰 비중으로 참여하고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지만 국내의 전직 고위공무원, 회계전문가, 현직 대학교수는 그러기 쉽지 않다.


또 다른 이유는 법률적 책임이다. 미국의 법원은 경영진의 실책으로 회사가 손해를 입어 주주들이 소송을 제기할 때 해당 경영 판단에 사외이사들이 관여했는가를 중요하게 본다. 사외이사들을 거친 경영 판단은 법률적으로 보호받는 빈도가 매우 높다. 투명성뿐 아니라 전문성을 존중한다는 취지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미국에서는 명실공히 이사회 경영이 이루어진다.

여기에서 '이사회 경영'을 지속적으로 비판받는 '오너 경영'과 함께 다시 생각해보자. 오너 경영 한국 대기업들에서 이사회 경영이 강조되는 것은 일견 모순되어 보인다. 투명성은 효율성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그러나 이사회 경영의 각론을 구성함에 있어서는 우리가 제도를 수입한 미국과 우리 특유의 역사적·사회적 현실 간 차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사회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약간의 오해 때문에 오너의 경영 의지나 결단력이 약화하거나 지연되는 것은 이사회 경영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바가 아니다.

회사가 잘될 때 대다수의 전문경영인은 현재의 사업을 계속 끌고 가고 싶어 한다. 미래를 예측해보면 사업의 방향을 지금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잘 보일 때도 마찬가지다. 당장의 수익성을 자발적으로 양보하고 투자에 따르는 불확실한 미래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는 어렵다. 이 때문에 임기나 퇴임이 없는 회장(오너)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회사의 발전이 나와 가족의 발전이고 회사와 나의 정체성이 일치하는 사람이 오너다. 그래서 오너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양보하는 결정도 내릴 수 있다.

우리 기업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미래에는 경영자 출신 사외이사의 비중이 늘어나고 오너 경영 대기업의 비중도 자연 감소하면서 이사회의 역할도 지금과 달라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차세대 스타가 될 스타트업의 성공이 언제나 중요한 것이라고 보면 미래에도 지금과 같은 오너 기업들은 여전히 많을 것이고 많아야 한다. 그래서 '이사회 경영'의 한국적 의미가 정립되어야 한다. 오너가 참여하고 매사 투명하지만 오너와 사내이사들의 경영 판단이 고도로 존중되는 이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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