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의 아내는 그날 이래로 10살, 5살, 1살 난 세 자녀를 홀로 키웠다. 사고 이후 구술 기록한 백서에 그는 "어디 가서 우리 신랑을 찾냐. 찾을 길이 없었다"라며 "산 사람 찾기는 포기하고 시신이라도 찾자고 돌아다녔다"고 전했다.
다이너마이트 914상자 실은 열차서 '촛불' 켰다

화약열차는 역내 대기하지 않고 직통 운행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원칙을 훼손하고 '급행료'라는 명목의 뇌물을 낸 열차를 우선 통과시켜줬다. 돈을 내지 못한 화약열차는 긴 대기 시간을 감당해야 했다.
당시 한국화약주식회사 호송 직원 신무일씨는 이리역에 항의를 하고 나섰지만 묵살당했다고 전해진다. 신씨는 항의를 포기하고 이리역 앞 주점에서 음주한 뒤 열차 안 침낭에서 잠을 청했다. 잠이 꼬박 든 밤 9시15분, 화약 상자 위에 켜져 있던 촛불이 화근이었다.
불이 화약 상자에 금세 옮겨붙었다. 열차 폭발 직전 신씨는 불붙은 상자를 보고 침낭을 이용해 불을 끄려고 해봤다. 불은 되레 더 크게 번졌다. 신씨는 현장을 방치하고 그대로 도망쳤다. 대부분의 철도 요원과 검수원들도 폭발을 막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결국 열차 안에 있던 다이너마이트를 비롯한 폭발물이 연쇄적으로 터지면서 대폭발이 일어났다. 이리역에는 직경 30m, 깊이 15m에 이르는 큰 웅덩이가 생겼다. 반경 500m 이내 건물은 대부분 무너졌고, 4㎞ 안쪽 건물은 유리창이 깨졌다. 군산시까지 폭발음이 들렸다는 증언도 있다.
사망자 59명, 부상자 1343명, 이재민 9973명이 발생한 대형 참사였다.
철도순직자 아내 "시체를 놓고 우는 사람이 부러웠다"

백서에는 당시 29세 철도순직자 남편 엄상호씨를 잃은 아내의 이야기도 기록됐다. 그는 "폭발한다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불이야' 하고 사람들이 달려가니까 (기관차 안에서) 내다봤던 것"이라며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바라보는 순간에 (폭발이 나) 얼굴에 파편을 맞았다"라고 회상했다.
사고 원인을 제공한 신씨는 얼마 후 검거됐다. 그는 1978년 2월 법원에서 폭발물파열죄(부작위에 의한 폭발물사용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현재까지도 사망자 전원의 정확한 신원과 직접적인 사망 원인이 모두 알려지지 못했다. 신원이 확인됐으나 성명이 미상인 사망자는 3명이다.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무연고 사망자로 분류된 사망자는 28명이다. 특히 이리역 주변에 홍등가가 있어 그곳에서 일하던 여성들의 피해를 정부가 공식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역 폭발 사고는 원칙을 무시해 대규모 참사로 번진 인재로 꼽힌다. 한국화약주식회사가 출발 전 폭약과 뇌관을 한 열차에 운반할 수 없다는 원칙을 어겼다. 이리역은 화약류 등의 위험물을 실은 열차는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통과시켜야 한다고 명시한 당시 철도법 제61조를 위반했다. 차내 소화 장비는 없었고 일부 역무원들은 불을 보고도 현장을 이탈했다.
※참고 자료
이리역 폭발 사고 시민백서(2019, 익산시)
디지털익산문화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