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노동운동가 전태일은 온몸에 불이 붙은 채 외쳤다. 그는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 앞길을 뛰어다니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몇 마디 구호를 외치다가 그 자리에 쓰러졌다.
하루 14시간 일했는데 '일당 50원'…열악했던 노동 환경전태일은 1948년 대구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이 더욱 어려워지자 서울로 올라왔고,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전태일은 학교를 그만두고 거리에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이어갔다.
평화시장에는 의류를 만드는 공장들이 많았다. 노동자들은 햇볕조차 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오랜 시간 일했다. 고된 나날들 속에서도 열심히 일했던 전태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재봉사가 됐고, 열악한 노동 현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특히 전태일은 함께 일하던 어린 여공이 가혹한 근무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해고되는 걸 보고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1968년에는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걸 알고 공부하면서 법에 규정된 최소한의 근로 조건조차 지켜지지 않는 부당한 현실을 깨달았다.

1969년에는 평화시장의 노동 실태를 조사한 뒤 동대문구청과 노동청 등을 찾아가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 환경을 개선해달라고 했지만, 아무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노동시간 단축 △매주 일요일 휴일 보장 △임금 인상 △건강검진 등을 요구하는 탄원서를 보냈으나 전달되지 못했다.
"근로기준법 준수하라!"…불에 타면서도 외친 말1970년 9월 전태일은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가 됐다. 당시 하루 평균 14시간 이상 일하는 노동자들의 월급은 1800원에서 1만5000원 사이였다. 재단사는 2만~3만원까지 받았다. 당시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은 약 100원이었다.
전태일은 언론사들을 찾아다니며 노동자들의 참상을 전달하는 등 본격적으로 근로조건 개선을 촉구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노동청에서는 같은 해 11월 7일까지 법을 개정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일에도 아무 움직임이 없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계획했다.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등 외치며 뛰어다녔다. <전태일 평전>을 집필한 인권변호사 조영래에 따르면 전태일의 부탁을 받은 친구가 그에게 성냥 불을 붙였고, 불길은 순식간에 전태일의 몸을 휘감았다.
전태일은 불타는 몸으로 몇 마디를 더 외치다가 결국 쓰러져 3분 정도 방치됐다. 그때 누군가는 근로기준법 법전을 불길 속에 집어 던졌다. 그런데도 전태일은 다시 일어나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친구들아, 싸워다오"라고 소리쳤다.

당시 의사는 전태일의 약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주사를 2번 놓으면 화기를 가시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전태일 어머니가 "집을 팔아서라도 돈을 갚을 테니 주사를 맞게 해달라"고 하자 의사는 근로감독관의 보증을 받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평화시장 담당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은 보증을 거부했다. 전태일은 다른 병원으로 옮겨지고 나서도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3~4시간 동안 방치됐고, 같은 날 오후 10시쯤 "배가 고프다"는 말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전태일이 몸을 불태웠던 청계천 다리에는 동상이 세워졌다. 그의 삶을 기록한 책 <전태일 평전>과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1995)도 만들어졌다. 아들 유언에 따라 노동운동 지원에 헌신해온 전태일 어머니는 '노동자들의 어머니'로 불리며 활동하다 2011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