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환 1개' 사실이었네... 히틀러 비밀 밝혀진 '맥주홀 폭동'[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지산 기자 2023.11.08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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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맥주홀 폭동 이후 재판을 기다리는 주모자들. 오른쪽 네 번째가 히틀러/사진=위키피디아 맥주홀 폭동 이후 재판을 기다리는 주모자들. 오른쪽 네 번째가 히틀러/사진=위키피디아


"히틀러는 짝XX(one ball)이라네"

2차 대전 당시 구전 동요 가사 중 일부다. 전쟁광을 깎아내리기 위해 연합군이 만든 수준 이하 노래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히틀러의 은밀한 비밀
독일 에를랑겐대학 역사학 페터 플라이슈만 교수가 2015년 12월 바이에른주 문서고에서 히틀러와 그의 나치당 소속 일당이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복역 중일 때 기록에서 확인한 내용이다.

552장 분량의 기록 중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부분이 바로 풍문으로만 전해지던 '히틀러 고환 1개설'이 사실이었다는 점이다.



영국 어린이들은 '히틀러 고환송(song)'을 영화 '콰이강의 다리' 주제가였던 '보기 대령 행진곡' 곡조에 맞춰 불렀다.

세간에는 히틀러가 1차 세계대전 당시 솜강 전투 도중 파편에 맞아 고환을 잃었다는 해석이 있었다. 폴란드 성직자이며 역사가인 프란시스제크 파올러는 히틀러를 치료했다는 독일군 위생병에게 들은 얘기라며 사실처럼 묘사하고 다녔다.

히틀러는 이 교도소에서 요제프 브린슈타이너 의사에게서 검진받았다. 검진 결과 오른쪽 고환이 신체 내에 머문 채 밖으로 나오지 않았거나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고.


이 모든 게 1923년 11월8일 벌어진 '뮌헨 맥주홀 폭동' 나비효과였다.

폭동 주축세력인 돌격대(SA)/사진=위키피디아폭동 주축세력인 돌격대(SA)/사진=위키피디아
국가전복 시도
이 사건 전까지 아돌프 히틀러는 그저 그런 동네 극우 정치 꿈나무에 불과했다. 그러나 8~9일 이틀간 벌어진 무장 투쟁으로 히틀러는 순식간에 전국구 스타로 발돋움했다.

히틀러는 혼돈의 시대가 낳은 괴물이었다. 베니토 무솔리니가 로마 진군에 성공해 파시스트들에게 큰 영감을 줬다. 하필 프랑스 레몽 푸앵카레 정권은 독일 전쟁배상금을 명분 삼아 루르 지방을 점령, 독일을 자극했다.

1차 대전 패전국, 독일에 대한 열강들의 압박은 극우 출연을 부채질했다. 극우 세력들은 '독일 투쟁 동맹'이라는 연합체를 만들고 히틀러가 수장이 됐다. 다양한 세력들이 모인 단체여서 결속력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러나 뛰어난 웅변가였던 히틀러가 본거지인 바이에른주를 중심으로 세력을 모으면서 조직이 갖춰졌다.

이 무렵 나치당은 1만명 당원에 돌격대(SA)를 거느리고 있었다. 애초 히틀러는 바이에른주 실력자인 주지사 구스타브 리터 폰 카르 등에게 베를린으로 진군에 손잡자고 했지만 카르가 거절하자 이들을 제거하고 독자 행동에 나설 계획을 세웠다.

1923년 11월8일 밤, 히틀러는 이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카르가 뷰르가브로이케라 맥주홀에서 공화국 혁명 5주년 기념집회에서 연설할 시각, 기관총으로 무장한 SA 단원 600명이 맥주홀을 포위했다. 헤르만 괴링,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루돌프 헤스 등 나치당 수뇌부들에 둘러싸인 히틀러가 등장했다.

연단에 선 히틀러는 천장에 권총을 발사하며 외쳤다. "독일 혁명이 시작됐다. 베를린과 바이에른 정부는 지위를 잃었고 새 정부가 만들어진다"

카르 등 주정부 요인들은 격리됐다. 그러나 9일 새벽 탈출에 성공, 곧바로 자신들은 반란과 무관하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반란 나치당원들이 뮌헨을 행진하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반란 나치당원들이 뮌헨을 행진하는 모습/사진=위키피디아
실패한 반란, 히틀러만 빛났다
나치는 2000명 시위대와 함께 뮌헨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시민들은 동조하지 않았다. 마침 탈출한 바이에른 실력자들이 경찰을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반란 주모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 과정에서 14명이 죽었다.

이틀 뒤 히틀러가 체포됐다. 재판은 오히려 히틀러를 스타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역설하자 언론은 이를 자세하게 소개했다.

히틀러는 5년 금고형을 선고받았지만 9개월 징역에 그쳤다. 옥중 집필의 결과물이 바로 '나의 투쟁'이다. 국가 전복은 실패했지만 나치와 히틀러는 일약 전국구로 부상했다. 1929년 대공황은 취약한 독일 경제를 더 깊은 수렁에 몰아갔다. 체제 불만 세력이 넘쳐나면서 극우 나치가 일거에 대안 세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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