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항소심 공판에서 진술하고 있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사진=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김재규는 박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인물이기에 그가 시해의 주범이라는 소식은 전 국민을 경악하게 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며 담담하게 사형을 받아들였다.
김재규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 잠꼬대에 지나지 않아"
10·26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박 전 대통령은 1969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밝힌 아시아에 대한 외교 정책인 이른바 '닉슨 독트린'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닉슨 독트린에는 미국이 앞으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며 아시아 제국과의 조약상 약속은 지키지만, 강대국의 핵에 의한 위협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내란이나 침략에 대해 아시아 각국이 스스로 협력해 그에 대처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박 전 대통령은 주한미군 감군은 북한의 남침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반대 의사를 밝혔다. 당시 한국은 북한의 침공을 막아낼 독자적인 전력이 없는 상태였고, 결국 박정희 정부는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을 북한에 파견해 7.4 남북 공동 성명을 비밀리에 합의시켰다. 대한민국의 핵무기 개발이 처음 시도된 것도 이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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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김재규는 닉슨 독트린에 저항하는 박정희의 자주국방 정책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실제로 10.26 사건 재판 뒤 항소이유보충서에 따르면, 김재규는 대한민국의 자주국방 실현에 대해 "잠꼬대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과열된 파벌 싸움, 자존심 센 '심복'을 건들다
10·26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파벌 싸움 역시 김재규가 박 전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게 한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김재규는 장교들로부터 "자존심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그런 김재규는 차지철 당시 경호실장과 견원지간이었는데, 시해가 발생한 10월 26일 오전에도 차지철과 김재규는 갈등을 빚었다.
이날 박 대통령은 충남 당진에서 열린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과 KBS 당진송신소 준공식에 참석할 예정이었다. 이 중 당진송신소는 대북방송 송신 기능 때문에 김재규가 있던 중정이 관리하던 보안시설이었다.
김재규로서는 준공식에 참석할 명분이 있던 것인데, 차지철은 "지금 시국이 어느 때인데 정보부장까지 서울을 비우면 어쩌란 말입니까? 김 부장은 참석하지 말고 자리를 지키세요"라며 김재규에게 면박을 줬다.
궁정동에 울린 총성…18년간 이어지던 정권이 무너지다
10·26사태 현장검증을 하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사진=머니투데이 DB
김재규는 연회 도중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 박흥주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를 불러 "박선호 너는 정인형(대통령 경호처장)과 안재송(대통령 경호부처장)을 처단하고, 박 대령(박흥주)은 경비원들과 함께 주방의 경호원을 모두 없애라. 이것은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후 7시 41분, 자리에 돌아온 김재규는 "건방져"라는 고함과 함께 발터 PPK를 꺼내 두 발을 쐈다. 첫 발은 차지철의 오른쪽 손목에, 두 번째는 박 전 대통령의 가슴에 맞았다.
김재규는 차지철과 박정희를 확인 사살하려고 했으나 권총의 기능 고장으로 발포가 되지 않자 박선호로부터 S&W M36 치프 스페셜 리볼버를 넘겨받아 연회장으로 돌아와 차지철의 복부에 총을 발사해 치명상을 입혔다.
이어 그는 박정희의 우측 관자놀이를 노렸고, 탄은 박정희의 오른쪽 귀 바로 윗부분을 뚫고 들어가 지주막을 뚫고 뇌를 관통한 뒤 왼쪽 광대뼈에서 멈췄다. 18년간 이어지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정희 정권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김재규
1979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총을 발사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그해 12월 18일 재판을 마친 뒤 '독재를 끝내기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한 일이다'라는 취지의 말을 하고 있다. /사진=JTBC 캡처
1심 최후 변론에서 김재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다섯 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 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 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다섯 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김재규는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이듬해 5월 24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처형 며칠 전 교도관에게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밝혀지지 않은 살해 동기
10·26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 스틸컷 /사진=네이버 영화
2020년에는 김재규의 여동생 김정숙씨가 "오빠는 자신이 대통령이 되거나 국가에 반역하기 위해 박 전 대통령을 죽인 것이 아니다"라며 김재규의 내란 혐의 무죄를 주장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