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 보스톤’, 올드하지만 눈시울은 적시네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9.19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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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에 온가족이 보기에 안성맞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어떤 영화는 소재만으로도 반은 먹고 들어간다. 광복 이후 태극기를 달고 우승한 첫 국제 스포츠 대회인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출전한 서윤복과 그를 길러낸 손기정, 남승룡의 여정을 담아낸 ‘1947 보스톤’이 그런 영화다. 실화의 힘이 상당한 울림을 선사하는데, 문제는 그 울림이 짠한 만큼 나머지 반에 대한 아쉬움도 진하게 남는다는 거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우며 민족의 영웅으로 떠오른 마라토너 손기정(하정우). 가슴에 일장기를 가슴에 달고 ‘손 기테이’라는 이름으로 뛰어야 했던 그는 시상대에서 월계관으로 부끄러운 일장기를 가렸다. 이로 인해 일제의 압박을 받고 선수생활을 포기한다는 각서를 써야 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라는 독립했지만, 손기정의 기록은 일본에 귀속돼서 한국 국적으로 세계대회에 나간 공식 기록이 없다. 한국인이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세계 권위의 대회에 출전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베를린 올림픽 동메달리스트 남승룡(배성우)은 눈여겨보았던 서윤복(임시완)과 함께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자고 손기정을 설득한다.



나라를 잃었던 일제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이 금메달을 딴 사실은 유명하다. 독립 이후인 1947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서윤복이 우승을 했다는 사실도 꽤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서윤복의 우승에 손기정이 감독으로 참여했다는 사실, 서윤복의 기록이 스승 손기정 이후 12년 만에 세워진 세계 신기록이라는 사실, 남승룡이 코치 겸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해 노장의 나이로 12위의 성적을 거뒀다는 사실 등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1947 보스톤’은 어쩔 수 없이 울린다. 나라 잃은 슬픔을 터럭만큼도 느껴본 적 없는 요즘 세대의 눈시울도 젖게 만든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마라톤 경기 장면에서는 서윤복의 우승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긴장감이 지속된다. 코스로 뛰어든 관객의 개를 피하다 넘어지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안타까운 탄식의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러나 대회에 나가기까지 무수히 많은 역경과 난관이 있음에도, 그를 그리는 연출이 사뭇 익숙하여 밋밋하여 쉬이 감정의 예열이 되지 않는 점은 아쉽다. 미군정의 통치를 받으며 난민국으로 분류되던 1947년의 한국이 보스턴마라톤대회에 나가기 위해 거액의 보증금과 현지 보증인 확보라는 난관을 거치는 장면, 선수단이 김포에서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보스턴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군용기와 민간여객기를 수없이 갈아타는 험난한 여정, 보스턴에 도착하고도 난민국이라는 입장 때문에 성조기를 달고 달릴 뻔한 상황 등이 쉼없이 펼쳐지는데도 보는 이의 감정은 달뜨지 않는다.

소재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국뽕’과 ‘신파’ 때문은 아니다. 순간순간 먼저 내달리는 OST가 튀긴 하지만, 오히려 예상했던 것보다는 ‘국뽕’과 ‘신파’를 최대한 덜어내고 담담하게 그리고자 한 의도는 보인다. 실의에 빠졌으나 목표를 상정하고 엄격하게 나아가는 손기정, 가난한 환경 속에 아픈 엄마를 돌보기 위해 달리는 서윤복, 그리고 손기정과 서윤복 사이의 충돌을 중재하고 안팎으로 챙기는 남승룡의 조합이 안정적인 삼두마차 형식을 꾀하는 건 좋다. 그러나 캐릭터들, 특히 극을 이끄는 손기정과 서윤복의 캐릭터를 지나치게 평면적으로 담은 부분이 아쉬운 포인트. 체지방률을 6%까지 낮추며 마라토너 그 자체로 변신한 임시완의 투혼은 다가오지만, 엄마와의 전사(前史)나 손기정과의 갈등은 도식적으로 느껴진다. 갈등을 극복하는 전개도 99% 예상 가능할 만큼 투박하게 그려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이에 반해 음주운전 논란으로 물의를 빚었던 배성우가 맡은 남승룡은 인상적이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손기정의 명성에 가려졌던 남승룡의 진가를 ‘1947 보스톤’에서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보증인으로 나서는 보스턴 현지 사업가 백남현을 연기한 김상호의 감초 연기도 분위기를 살린다.

‘은행나무 침대’ ‘쉬리’ ‘태극기 휘날리며’ 등 굴지의 히트작을 연출했던 강제규 감독이 간만에 메가폰을 잡은 ‘1947 보스톤’은 추석 시즌인 오는 27일 개봉한다. 2023년의 MZ세대, 잘파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 태어난 세대) 관객들이 보기엔 올드하다 여겨지겠지만 50~60대 이상 부모님과 함께 관람할 예정이라면 추석 영화 중 가장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겠다. 어쨌거나 한민족의 DNA 어디 안 가고, 결정적인 장면에선 확실한 카타르시스를 주니까. 12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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