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무대미술가의 눈으로 본 새 민방위복
머니투데이 박동우 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
2023.09.20 02:02
박동우(무대미술가·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 교수)압축적인 표현이 특징인 무대예술의 성격상 무대 위의 모든 것은 상징과 기호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중 등장인물이 입는 무대의상은 특히 그렇다. 지난달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 관련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하는 자리에 국무총리가 청록색 새 민방위복을 입고 나왔다. 전 국민을 관객으로 한 국무총리의 대국민담화 '무대의상'을 무대미술가의 눈으로 살펴봤다.
첫째, 장면의 상황과 목적에 의상이 부합하는가다. 공연에서는 각 장면의 상황에 맞는 의상을 입는다. 리어왕은 첫 장면에서 화려한 왕의 복장을 입지만 딸들에게 배신당하고 광야를 떠도는 장면에서는 누추한 옷을 입는다. 어사 이몽룡은 거지옷을 입고 옥에 갇힌 춘향을 만나지만 암행어사 출도 장면에서는 위엄 있는 어사복을 입는다. 민방위기본법에 따르면 민방위란 '민방위사태로부터 주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정부의 지도하에 주민이 수행해야 할 방공, 응급적인 방재·구조·복구 및 군사작전상 필요한 노력지원 등의 모든 자위적 활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민방위사태란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혹은 통합방위사태 혹은 특별재난지역 선포 등의 국가적 재난, 그밖에 행정안전부 장관이 정하는 재난사태 등을 말한다'고 한다. 정부는 그 담화문 내용과 별개로 일본의 원전 오염수 방류사태를 우리 국민의 재난상황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상 선택으로 보여준 셈이다.
둘째, 옷의 색상이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다. 오페라 '카르멘'에서 주인공이 입는 빨간색 옷은 열정을 의미한다.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펠레스는 검은색과 빨간색이 혼합된 의상을 주로 입는데 죽음과 악마성, 공격성을 의미한다. 뮤지컬 '영웅'에서 안중근을 쫓아다니는 일본 형사도 그렇게 입는다. 일상생활에서도 색상은 언제나 의미를 가진다. 장례에서 상주가 검은색 상복을, 결혼에서 신부가 하얀색 드레스를 입는 것은 각각 엄숙함과 순결함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각 시기의 행안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종전 민방위복의 라임색은 주의나 조심의 의미로, 이번에 확정한 청록색은 평화와 안전의 의미로 선택했다고 한다.
셋째, 옷의 색상이 가지는 기능성이다. 무대에서는 옷의 색상에 따라 인물이 보이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어두운 배경의 공연무대에서 주인공은 일반적으로 밝은 의상을 입고 주인공보다 눈에 덜 띄어야 하는 인물들은 그보다 어두운 색의 옷을 입는다. 오페라에서 오케스트라 피트 속의 연주자들은 눈에 띌 필요가 없으므로 모두 검은 옷을 입는다. 극단적인 경우 무대전환수는 긴 팔 검은 옷에 검은 장갑과 검은 신발,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다. 반대로 무대배경이 밝은 경우도 있다. 무대 전체를 전통 한지로만 꾸민 뮤지컬 '서편제'에서는 전환수들이 흰옷과 흰 신발을 신었다. 이번 무대에 총리는 청록색 민방위복을 입고 나왔다. 종전 노란 민방위복의 정확한 색상 명칭은 라임색으로 2005년 30년 가까이 입은 카키색에서 변경된 것이다. 당시 정부는 재난상황에서 시인성이 우수한 라임색으로 결정했고 산불진화와 수해복구 현장에서 활동할 때의 실용성을 고려해 라임색을 선택했다고 했다. 이번에 바뀐 새 민방위복의 녹색은 재난현장 등에서 소방·경찰 등 다른 제복의 색상과 잘 구별된다고 행안부는 밝혔다. 두 색상 모두 시인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는데 각각 어떤 재난상황을 무대배경으로 고려했는지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런데 민방위복의 색상에 관해 조사하다 처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1975년 최초 민방위복은 '카키'색이었고 2005년 '라임'색으로 바뀌었다가 색상변경을 위해 2022년 정부가 선보인 5가지 시안은 '다크그린, 네이비, 그린, 그레이, 베이지'였고 이 중 '그린'으로 확정했다고 한다. 정부가 단 한 번도 우리말로 색상이름을 발표하지 않았다는 점이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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