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한 변희봉, 사진=스타뉴스DB
그가 우리에게 남긴 강렬한 첫 인상은 1980년대 MBC 사극 '조선왕조 500년– 설중매'의 유자광일 것이다. 조선 전기의 풍운아와 같은 정치인이었던 그는 “바로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유행어와 함께 40대의 나이에 첫 전성기를 누린다. 이후 그는 수많은 작품을 거쳤고, 특히 사극 장르에서 장기를 발휘했다. 왠지 모를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독특한 발성은 서서히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고, 코믹 캐릭터와 악역이 모두 가능한 이미지를 갖춰 나갔다. 이두용 감독의 '내시'(1986) 등 1980년대에 몇 편의 영화에도 등장했지만, 20세기에 그의 주무대는 브라운관이었다.
고 변희봉의 빈소 사진. 사진=스타뉴스DB
2006년 영화 '괴물' 기자시사회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고 변희봉. 사진=스타뉴스DB
그러고 보니 그는 표정으로 기억되는 연기자였다. '선생 김봉두'(2003)에서 내내 무뚝뚝했지만 마지막에 봉두(차승원)에게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때의 미소, '더 게임'(2007)에서 악마성과 비굴함을 오가는 얼굴, '주먹이 운다'(2005)에서 상환(류승범)을 단련시키는 박 사범의 바위 같은 느낌… 그는 '불어라 봄바람'(2003)의 낭만적인 노년부터 '시실리 2Km'(2004)의 음산한 기운까지, 특유의 보이스 컬러를 바탕에 다양한 표정을 입히며 변신했던 독보적인 캐릭터 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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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자'로 칸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칸영화제에 간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며 “고목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이야기했던 배우 변희봉. 2020년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을 땐 “크게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데 부끄럽다”고 했던 그는, 항상 겸손했고 성실했던 연기자였다. 그가 남긴 표정들을 떠올리며, 그의 명복을 빈다.
2017년 영화 '옥자' 개봉 당시 후배 스티브연 최우식과 함께 포즈를 취한 변희봉(가운데). 사진=스타뉴스DB
p.s. 떠올려 보니 변희봉 배우와 전화 통화를 했던 적이 있었다. 매니저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다가 촬영 일정상 힘들다는 얘기를 들은 지 며칠 후였다. 배우는 직접 필자에게 전화를 하셔서 말씀하셨다. “우리 애(매니저)가 뭘 잘 모르고 인터뷰를 거절한 모양인데, 참 미안합니다. 요즘 촬영 일정이 있긴 한데 곧 끝나니까, 다시 한 번 요청 주시면 꼭 하겠습니다. 잘 모르고 그런 거니까 이해해주십시오.” 그때가 뚜렷이 기억나는 건, 마치 '괴물'에서 아들을 감싸듯, ‘우리 애’라고 표현하시며 젊은 매니저의 행동을 변호하시던 따스한 말투 때문이다. 그의 연기에서 느낄 수 있었던 인간적인 느낌은 이런 성정에서 비롯된 건 아니었을까? 다시 한 번 ‘배우 변희봉’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