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이 태풍의 직접영향권에 들자 동해 남부선을 포함해서 경상도로 향하는 모든 열차가 운행 중단되고 모든 전선전화가 두절돼 통신에 곤란을 겪었다. 부산에서는 해일로 인해 방파제가 무너져 해수가 도시 내로 흘러들어 중구 남포동과 영도구 대평동 일대가 물에 잠기고 부산세관 소속 보세 창고가 침수됐다.
9월17일 추석 저녁부터 몇일은 전기가 끊겼다. 당시 마산의 각 극장들에서는 대목을 맞아 각기들 특선프로를 내걸고 있었다. '장마루촌의 이발사,' 시민극장은 '뇌격명령'이라는 미국 영화 등이었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17일 시내 전역이 정전이 되면서 저녁 상영이 이뤄지지 못했다.
특히 이날은 추석이었는데 일기예보도 없던 시절이어서 아무것도 모르고 차례 지내다가 피해를 본 사람이 많았다.
또 당시 부산에서 최저 해면 기압이 무려 951.5hPa가 측정됐는데, 이는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불가사의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위력답게 어마어마한 피해를 남기고 갔다. 전국에 사망 849명, 부상 2533명, 실종 206명으로 이재민 총 37만3459명이 발생했다. 또 선박 1만1704척과 피해 주택 1만여 동, 침수 농경지 20만여 ha 등 피해를 입었다. 도로 1만 226개소, 제방 1618개소, 축대 152개소, 교량 2개소가 유실되거나 파손됐다. 이로 인한 재산 피해는 당시 화폐 단위로 약 1662억원(4500만달러)이라고 하며 2022년 8월 가치로는 6조 9140여억원이다.
때문에 사라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지옥 같은 태풍으로 기록되고 있다.
한국전쟁 끝난후 복구시기에 불어닥친 위기...한국 경제에 결정타

9월 17일 밤 12시에 태풍이 동해안으로 빠져나감으로써 더이상의 피해는 없게 됐지만 이미 사태가 심각한지라 정부는 직접 조사에 나섰다. 국무회의에서는 태풍 사라에 관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으며 막대한 피해액 탓에 미국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태풍 사라로 피해를 입었을 때 북한에서 원조를 제의하기도 했다. 9월 24일 북한이 원조하겠다고 요청했으나 정부는 동정심을 유발하게 하는 선전책으로 판단하고 '논평할 가치도 없다'며 무시했다. 한편 정부는 국민을 대상으로 12월까지 모금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1959년 사라 태풍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면서 경기만 북서부 연평도에도 큰 피해를 입혔다. 당시 연평도는 조기가 굉장히 많이 잡혀서 어선 수천 척이 연평도로 몰려 들었는데, 태풍이 북상한 이후 전라도와 연평도 지역의 어부들이 조기잡이를 하러 연평도까지 나갔다가 그만 태풍에 휩쓸려 변을 당하기도 했다. 예고 없이 불어 닥친 풍랑에 사망한 어부들도 많았다.
연평도 조기잡이 도중 사라 태풍으로 순직한 어부들을 기리면서 5년 뒤 1964년 '눈물의 연평도'라는 노래가 나왔다. 노래가 나올 당시에 연평도에서 가족을 잃은 많은 사람들이 듣고 울었고, 아직도 연평도의 할머니 또는 중년층들 중 당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기쁠 때나 슬플 때 이 노래를 애창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