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척 배로 日수군 괴멸…충무공 불멸의 기록, 명량 대첩[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채태병 기자
2023.09.16 05:30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영화 '명량' 공식 예고편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必死則生 必生則死)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기간에 쓴 난중일기에 적힌 표현이다. 이순신은
1597년 9월 16일(음력기준) 벌어진 명량 해전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하들에게 이 같은 명령을 내렸다.
명량 해전 당시 이순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의 판옥선은 13척에 불과했다. 같은 해 7월 이순신을 대신해 삼도수군통제사(조선 수군의 최고 지휘관)에 올랐던 원균이 일본군에게 대패했기 때문이다.
원균은 부산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판옥선 160여척을 동원했다. 하지만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칠천량에서 처참하게 패했다.
/사진=영화 '명량' 공식 예고편이후 선조는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해 조선 수군을 복구하도록 했다. 이순신은 칠천량 해전에서 도망쳤던 12척의 배와 전라 우수사 김억추가 끌고 온 1척의 배를 모아 명량 해전을 준비했다.
이순신은 첩보 작전을 통해 일본군의 왜선이 약 300척에 달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적의 규모를 파악한 이순신은 조선 수군의 진영을 전남 해남에 있는 전라우수영으로 옮겼다.
해남 바다에는 우리나라에서 조류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진 해협이 있었다. 울며 돌아가는 길목이란 뜻의
울돌목이 바로 그곳이다. 울돌목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명량(鳴梁)이다.
/사진=영화 '명량' 공식 포토명량 해전이 시작됐고 일본군은 배 133척을 동원해 조선 수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에 맞서 조선 수군의 13척 판옥선이 출전했다. 이순신이 직접 지휘하는 대장선은 왜선들을 향해 곧바로 돌격했지만, 나머지 12척은 겁을 먹은 나머지 진격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의 대장선은 홀로 수많은 왜선과 맞서야 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당시 상황을 "다른 장수선을 돌아보니 (전장에서) 물러나 먼바다에서 관망하며 나아가지 않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순신의 대장선이 거센 조류를 이용해 왜선들과 아슬아슬한 전투를 이어갈 때, 드디어 안위와 김응함의 배가 전장에 합류했다. 그제야 다른 판옥선들도 전투에 임하며 일본군을 향한 반격에 나섰다.
/사진=영화 '명량' 공식 포토어느덧 시간은 오후가 됐고 울돌목의 물살이 바뀌기 시작했다. 명량 해협의 물살은 약 6시간마다, 즉 하루에 4번 변한다. 갑자기 바뀐 물살에 왜선들은 역류를 타게 됐고, 일본군은 판옥선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조선 수군은 이 기회를 이용해 화포를 쏟아부어 수십척의 왜선을 침몰시켰다. 일본군은 더 이상 전투를 벌이기 어렵다는 판단에 도주했다. 10배 이상의 전력 차이가 났던 명량 해전이 조선 수군의 승리로 끝난 순간이었다.
이순신은 압도적 승리를 거둔 명량 대첩에 대해 "실로 천행(天幸)이었다"고 난중일기에 적었다. 철저한 준비 과정을 거쳤음에도 하늘의 행운이 따랐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명량 해전은 한국사뿐 아니라 이순신 본인에게도 엄청난 전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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