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값싼 원전·러시아산 에너지가 사라졌다
문제가 불거진 건 러시아가 에너지 인질극을 시작하면서다. 러시아는 전쟁 이후 서방 제재로 사면초가 처지에 놓이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관을 잠갔다. 노르트스트림1 시설 정비를 이유로 독일에 보내는 가스 공급량을 점차 줄이다가 지난해 9월 공급을 완전히 차단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줄어들자 독일 에너지 기업들은 현물 시장에서 과거보다 더 비싸게 가스를 살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에너지 사용량이 높은, 독일 경제의 심장 제조업에 타격을 줬다. 전기료, 천연가스료 등 에너지값이 급등하면서 화학, 금속 등 에너지 집약 산업이 크게 위축되고 가계의 실질 구매력이 감소했다. 로이터는 레피니티브 자료를 인용해 7월 기준 독일의 전기료가 2018~2022년 평균보다 약 75% 높다고 전했다. 그 결과 제조업 의존도가 높은 독일은 올해 주요 7개국(G7) 중 유일하게 역성장할 것으로 보인다.
독일은 탈원전으로 인한 발전 공백을 재생에너지로 충당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풍력이나 태양열과 같은 재생에너지는 시간·계절 등 날씨에 따라 생산량이 달라져 변동성이 크다. 이로 인해 독일은 부족한 발전 규모를 수입한 전력으로 메웠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2분기 독일은 185억kWh(킬로와트시)의 전력을 수입, 1991년 통계 집계 이후 분기 기준 최대치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수입에서 수출을 뺀 순수입량은 71억kWh로, 독일 마지막 원전 3기의 지난해 2분기 발전규모(73억kWh)와 거의 비슷한 수준이라고 dpa통신은 설명했다.

기업들은 정부의 에너지 정책을 '실책'으로 본다. 독일 산업상공회의소(DIHK)는 탈원전으로 인한 에너지 공급부족과 가격 상승 가능성에 대해 경고해왔다. DIHK가 지난 6월12일부터 7월2일까지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독일 3572개 기업 중 절반 이상인 52%가 에너지 전환 정책이 자사의 경쟁력에 부정적 혹은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응답했다. DHIK는 "원자력 에너지의 퇴출, 석탄화력 발전의 단계적 폐지, 전력망 요금의 상승으로 인한 에너지 문제는 장기적으로 독일 기업들에 부담이 될 것"이라며 "재생에너지와 수소 분야의 개발이 너무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탈독일을 고심하는 기업도 늘었다. 같은 조사에서 기업 중 31.7%가 해외로 생산기지를 이전하거나 독일 내 생산을 줄일 계획을 준비 혹은 실행 중이라고 답했다. 이는 지난해(16%)보다 두 배가량 늘어난 수치다. 독일 투자은행 베렌버그가 지난달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기업들이 에너지 집약적인 생산 공정을 전기 및 가스가 저렴한 미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으로 이전하면 독일은 현재 산업 생산 능력의 2~3%를 잃게 된다.
홀거 슈미딩 베렌버그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 몇 달간 미래 에너지 가격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업 심리가 급격히 위축되고 생산기지 이전 움직임이 일고 있다"고 분석했다.
복원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지만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원전 가동 재개 가능성을 일축했다. 숄츠 총리는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원전 재가동 논란과 관련해서는 총리로서 추가로 결정적 언급을 할 필요조차 없는 사안"이라며 "탈원전은 이미 법적으로 시행된 지 오래"라고 강조했다.
독일 연립정부는 10가지 경기 부양책을 발표하며 기업 달래기에 나섰다. 여기에는 기후 변화 대응과 에너지 효율 향상을 목적으로 투자를 단행하는 기업에 세금 감면을 제공하고, 연구·개발(R&D) 촉진을 위한 보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중소기업에는 향후 4년 동안 연간 70억유로(약 10조202억원)의 세금을 덜어준다. 증세를 통한 복지확대를 강조하는 사회민주당(SPD)이 이끄는 연정이 감세안을 내놓은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獨 경기 침체, 남의 일 아니다"…中의존·고용시장 '닮은꼴 경제'

과거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을 흔히 '라인강의 기적'에 빗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폐허가 됐지만 1950년대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뤄냈다. 한국 역시 한국전쟁으로 주요 산업 시설이 멈췄지만 1960~1970년대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개발도상국의 롤모델이 됐다.
두 나라는 제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수출을 확대해 경제 규모를 키웠다. 글로벌 시장에서 지난 20여년 동안 중국이 급격히 부상한 것이 큰 힘이 됐다. 비중이 줄고 있지만 중국은 여전히 한국의 최대 수출국이다. 독일에 있어서도 중국은 최대 교역국(수출·수입 포함)이다. 지난해 기준 독일의 대(對)중국 수출 비중은 전체의 6.8%(4위), 수입은 12.8%(1위)에 달했다.
높은 중국 의존도가 독일 경제에 독(毒)이 됐다. 독일 경기 침체의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중국 경기 부진이 꼽힌다. 최근 국제금융센터는 '독일 경제 부진 장기화 배경 및 시사점' 보고서에서 "독일은 최종 수요와 자재 조달 모두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며 "중국의 성장 둔화, 중국 정부의 국산화 추진 및 수출 제한 조치 등도 경기 하방 압력을 가중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우리나라는 경기 부진이 점차 완화하는 상황이었는데 중국발(發) 리스크가 발목을 잡을 우려가 커지고 있다. 원래 우리 정부는 올해 경기 흐름을 상저하고(上低下高)로 예상하며 '하고'의 요인으로 중국 리오프닝(경제 활동 재개)을 꼽았는데 오히려 반대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한국은행은 올해 우리나라 성장률을 1.4%로 전망하면서도 중국 부동산 부진 지속으로 성장세가 추가로 약화할 경우 1.2~1.3%까지 낮아질 수 있다고 봤다.
![[서울=뉴시스] 이영환 기자 =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8월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기획재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대화를 하고 있다. 2023.08.22.](https://thumb.mt.co.kr/06/2023/09/2023090718320958391_4.jpg/dims/optimize/)
한국도 일자리 증가를 고령층이 주도하는 상황이다. 일례로 지난 7월 우리나라 취업자 증가폭(전년동월대비)은 21만1000명이었는데 연령대별로 구분해 살펴보면 60세 이상은 29만8000명 늘고 20대는 12만8000명 감소하는 등 고용 증가를 고령층이 이끌었다. 한은은 "최근 우리나라 고령층이 노동 공급 증가세를 견인하는 모습은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독일 노동시장 상황과 흡사하다"고 지적했다.
두 나라 모두 '건전재정'에 무게를 두면서 재정을 통한 경기부양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독일은 재정준칙(연방정부의 구조적 재정적자 규모를 GDP의 0.35% 이내로 유지) 시행으로 2011년 이후 긴축적 정책기조를 지속하고 있다. 독일 정부는 가계 구매력 약화와 투자 부족에도 재정준칙 준수 방침을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지난해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재정정책 기조를 '확장'에서 '건전'으로 전면 전환했다. 재정준칙 도입을 위한 입법화 작업은 미뤄지고 있지만 내년 예산안 증가율을 2005년 이후 가장 낮은 2.8%로 설정하는 등 '재정 허리띠'를 바짝 조이고 있다.
독일 경기 침체를 반면교사 삼아 한국도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은은 "독일 사례를 참고해 우리도 산업구조를 다변화하고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에 대비할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