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착각에 '살인자' 된 한인 청년…"나 아냐" 10년만에 증명된 결백[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류원혜 기자 2023.09.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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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고(故) 이철수씨의 모습. 오는 13일 개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는 이씨의 사건을 다뤘다. 영화 제목은 실제 벌어진 구명 운동의 이름이다./사진=영화 '프리 철수 리' 메인 예고편고(故) 이철수씨의 모습. 오는 13일 개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는 이씨의 사건을 다뤘다. 영화 제목은 실제 벌어진 구명 운동의 이름이다./사진=영화 '프리 철수 리' 메인 예고편


"나는 살인자가 아닙니다."

41년 전인 1982년 9월 3일. 살인 누명으로 옥살이하던 미국 동포 고(故) 이철수씨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석방된 이씨가 10년간의 복역 끝에 사회로 나올 수 있었던 건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이 사건은 미국 백인 사회에 홀로 던져진 한국 청년에 대한 차별과 불공정한 사법 제도를 보여준다. 미국 내 한인들을 처음으로 결속시킨 역사적 사건이자 아시아계 민권 운동의 모범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살인 용의자로 몰린 21세 한인 청년…엉터리 증언으로 '무기징역'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이씨는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또래를 폭행하다 교사에게 적발돼 퇴학 처분을 당했다. 훔친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경찰에 붙잡혀 절도죄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경찰은 동네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씨를 용의자로 잡아들였다.

그러다 1973년 6월 3일, 당시 21세였던 이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꾼 사건이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 거리 한복판에서 중국인 갱단 두목이 총격당해 숨진 것이다. 이씨는 살인 현장 근처에서 식사 중이었다.



한 백인 목격자는 이씨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다. 동양인 외모를 구별하지 못한 목격자는 이씨를 실제 범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고(故) 이철수씨의 모습. 오는 13일 개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는 이씨의 사건을 다뤘다. 영화 제목은 실제 벌어진 구명 운동의 이름이다./사진=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컷고(故) 이철수씨의 모습. 오는 13일 개봉되는 다큐멘터리 영화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는 이씨의 사건을 다뤘다. 영화 제목은 실제 벌어진 구명 운동의 이름이다./사진=영화 '프리 철수 리' 스틸컷
범행에 쓰인 권총은 이씨가 소지했던 총과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소년원 수감 이력을 확인한 경찰은 그를 긴급 체포했다. 물증도 없는 재판에서 다른 백인 목격자들의 엉터리 증언까지 이어지면서 이씨는 결국 1급 살인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씨는 캘리포니아에서 폭력으로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됐다. 1977년에는 싸움에 휘말려 다른 재소자를 살해했다. 이씨는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동료 재소자가 자신을 흉기로 찌르려고 해 정당방위하다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리 철수 리!"…10년간 복역 끝에 되찾은 자유의 몸
그대로 묻힐 뻔했던 사건은 의문을 품은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신문사의 이경원 기자는 이씨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들로부터 사건을 전해 듣고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 이씨의 억울한 사정을 확인해 1978년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다.

백인 목격자가 짧은 순간에 동양인의 특징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한 기사였다. 이를 계기로 이씨의 사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고(故) 이철수씨의 공판이 열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지방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사진=세계한민족문화대고(故) 이철수씨의 공판이 열린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 지방법원에서 공정한 재판을 요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사진=세계한민족문화대
한인 이민 사회를 중심으로 '이철수 구명위원회'가 조직됐고, 재심을 요구하는 '프리 철수 리'(Free Chol Soo Lee) 운동도 시작됐다. 미국 거주 한인들이 동포의 인권을 위해 전국적인 조직을 구성한 건 처음이었다. 일본과 중국, 필리핀 등 동양인들도 함께했다.

이들은 이씨의 자유를 위해 시위를 하거나 후원금을 냈다. 모인 기금으로 사설탐정을 고용하면서 사건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범행을 목격했던 증인도 찾을 수 있었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한 이씨는 마침내 1982년 무죄를 받아 냈다. 재소자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돼 재판 무효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했고, 구명위원회 변호인단은 검찰과 사전형량조정제도를 통해 '지난 10년간의 복역을 살인죄에 대한 복역 기간으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1983년 이씨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고(故) 이철수씨의 모습./사진=로이터=뉴스1고(故) 이철수씨의 모습./사진=로이터=뉴스1
이씨의 사건 이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이민자 학생들이 100명이 넘는 공립 학교에서는 의무적으로 이중 언어 교사를 채용해야 한다'는 조례가 제정됐다.

이씨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범죄 예방 활동을 하는 등 선도에 나섰다. 자신의 사건을 보도한 이 기자와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해 2014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향년 62세에 혈관폐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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