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년 전인 1982년 9월 3일. 살인 누명으로 옥살이하던 미국 동포 고(故) 이철수씨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듬해 석방된 이씨가 10년간의 복역 끝에 사회로 나올 수 있었던 건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살인 용의자로 몰린 21세 한인 청년…엉터리 증언으로 '무기징역'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 간 이씨는 학교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또래를 폭행하다 교사에게 적발돼 퇴학 처분을 당했다. 훔친 자전거를 타고 달리다가 경찰에 붙잡혀 절도죄로 수감되기도 했다. 이후 경찰은 동네에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씨를 용의자로 잡아들였다.
한 백인 목격자는 이씨를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다. 동양인 외모를 구별하지 못한 목격자는 이씨를 실제 범인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씨는 캘리포니아에서 폭력으로 악명 높은 교도소에 수감됐다. 1977년에는 싸움에 휘말려 다른 재소자를 살해했다. 이씨는 백인 우월주의자였던 동료 재소자가 자신을 흉기로 찌르려고 해 정당방위하다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했지만,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리 철수 리!"…10년간 복역 끝에 되찾은 자유의 몸그대로 묻힐 뻔했던 사건은 의문을 품은 한 기자의 끈질긴 추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미국 신문사의 이경원 기자는 이씨의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사들로부터 사건을 전해 듣고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 이씨의 억울한 사정을 확인해 1978년 사건의 전말을 보도했다.
백인 목격자가 짧은 순간에 동양인의 특징을 명확하게 구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제기한 기사였다. 이를 계기로 이씨의 사건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이씨의 자유를 위해 시위를 하거나 후원금을 냈다. 모인 기금으로 사설탐정을 고용하면서 사건 당시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범행을 목격했던 증인도 찾을 수 있었다.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재심을 청구한 이씨는 마침내 1982년 무죄를 받아 냈다. 재소자를 살해한 사건에 대해서는 정당방위가 인정돼 재판 무효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검찰은 항소했고, 구명위원회 변호인단은 검찰과 사전형량조정제도를 통해 '지난 10년간의 복역을 살인죄에 대한 복역 기간으로 인정한다'는 결정을 얻어냈다. 1983년 이씨는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씨는 청소년들을 상대로 범죄 예방 활동을 하는 등 선도에 나섰다. 자신의 사건을 보도한 이 기자와는 절친한 관계를 유지한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건강이 악화해 2014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 응급실에서 향년 62세에 혈관폐색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