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한장 '40억'…돈 쫓던 파파라치, 다이애나비 죽어가도 '찰칵'[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이은 기자 2023.08.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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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AFPBBNews=뉴스1/AFPBBNews=뉴스1


1997년 8월 31일 새벽 0시 25분. 프랑스 파리에서 발생한 교통사고로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가 세상을 떠났다. 집요하게 쫓아오던 파파라치를 피하려다 발생한 비극적인 사고였다.



1981년 찰스 왕세자(현 찰스3세)와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AFPBBNews=뉴스11981년 찰스 왕세자(현 찰스3세)와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AFPBBNews=뉴스1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1981년 찰스 왕세자(현 찰스3세)와 결혼하면서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른 영국 왕실 스타였다.



그는 찰스 왕세자와 카밀라 파커볼스(현 카밀라 왕비)의 불륜 등 순탄하지 않은 결혼 생활을 이어가다 1992년 별거 후 1996년 이혼했다. 그리고 이듬해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36년의 짧은 생이었다.

파파라치 피하려다 '쾅'…늦어진 구조, 결국 다이애나 사망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집트 출신 억만장자 故 도디 알 파예드./AFPBBNews=뉴스1故 다이애나 왕세자비, 이집트 출신 억만장자 故 도디 알 파예드./AFPBBNews=뉴스1
이날 다이애나는 연인이었던 도디 알 파예드와 프랑스 파리 리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즐겼다. 도디 알 파예드는 영국 리츠 호텔, 헤롯 백화점 등을 보유한 이집트 출신 억만장자 도디 알 파예드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친 뒤 고급 외제차를 타고 알 파예드 집으로 향하던 중 파파라치의 추격을 받았다. 운전사 앙리 폴은 오토바이를 타고 카메라를 들이대며 따라붙는 파파라치를 피하기 위해 속도를 한껏 높였다.

1997년 8월31일 프랑스 파리 알마 터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당시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도디 알 파예드가 탑승했던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 /AFPBBNews=뉴스11997년 8월31일 프랑스 파리 알마 터널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당시 故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도디 알 파예드가 탑승했던 메르세데스 벤츠 차량. /AFPBBNews=뉴스1
빠르게 질주하던 차량은 에펠탑 근처 알마교 터널에 들어서자마자 앞차와 충돌하면서 통제력을 잃었고, 이후 차량은 콘크리트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아 전복된 뒤 터널 벽을 들이받은 후에야 멈춰섰다. 호텔을 출발한 지 약 5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종잇장처럼 구겨진 차량의 모습은 당시 사고의 충격을 짐작케 했다. 사고 당시 운전기사 앙리 폴은 술을 마신 상태였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차 안에는 다이애나와 도디 알 파예드, 운전사 앙리 폴과 경호원 트레버 리스 존스까지 총 4명이 타고 있었다.

알 파예드와 앙리 폴은 현장에서 즉사했으나 다이애나는 사고 직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 그러나 파파라치들은 사고를 목격하고도 구조를 시도하거나 신고하지 않았고, 다이애나가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진을 찍는 데에만 급급했다.

사고 처리도 원활하지 못했다. 사고 10분여 만에 경찰과 구급차가 현장에 도착했지만 다이애나는 사고 후 30분이 지나서야 차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고, 약 2시간 만에야 간신히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 과정에서 심정지를 겪기도 했던 다이애나는 새벽 4시쯤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경호원 트레버 리스 존스만이 이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가 됐다.

사진 한 장에 40억원…구조 대신 촬영 택한 파파라치
왕세자비가 된 후부터 다이애나를 괴롭혀온 파파라치들은 그를 죽음까지 몰고 갔다.

사고 당일 파파라치들이 다이애나를 집요하게 따라붙은 이유는 '돈'이었다. 대중의 엄청난 관심을 받던 다이애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담은 사진이 비싼 값에 거래됐기 때문이다. 다이애나가 도디와 포옹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은 무려 250만 프랑(한화 약 38억원)에 팔리기도 했다.

그날 구조의 손길 대신 카메라를 들이민 파파라치들은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과실치사, 사생활 침해, 구조거부죄(선한 사마리아인 법, 자신에게 특별한 부담이나 피해가 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구조 불이행을 저지른 사람을 처벌하는 법)로 체포됐으나 대부분은 무죄를 받았고, 주범 3명만 상징적인 의미로 1유로(한화 약 1400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사고 10년 후인 2007년 열린 다이애나 사인 규명을 위한 법원 배심원단 심리에서는 "사고 당시 다이애나가 심각한 내상을 입은 건 사실이나 좀 더 신속히 병원으로 이송됐다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는 지적이 나와 안타까움을 남겼다.

끊이지 않는 음모론…다이애나 임신설→암살설까지
다이애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는 파리 경찰 조사 결과 "과음한 운전기사가 과속으로 차를 몰다 일어난 단순 교통사고"라고 결론지어졌다. 그러나 다이애나 죽음에 대한 음모론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영국 비밀 요원들이 다이애나를 암살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다이애나가 알 파예드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거나 그와 결혼할 계획이었다는 등의 이유로 왕정을 위협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여기에는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하메드 알 파예드의 비통함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는 다이애나가 유색인종인데다 이슬람 신자인 아들 도디의 아이를 임신한 후 결혼하려고 하자 자칫하면 왕위를 이을 왕자에게 혼혈 의붓동생이 생길 것을 우려해 영국 정보기관이 사고를 위장해 이들을 암살했다고 주장하며 음모론에 힘을 실었다.

그러나 임신도, 암살도 사실이 아니라는 결론이 났다. 2007년 11월 다이애나 시신을 검안한 병리학자 로버트 채트먼 박사는 사인심의 청문회에 출두해 "다이애나에게 임신 징후를 나타내는 '물리적 증거물'을 찾지 못했다"고 밝혔다.

이후 2008년 4월 검시 재판은 다이애나가 "파파라치와 운전사 앙리 폴의 중과실로 인한 비합법적인 사망"으로 결론을 내렸다.

英 왕실장 치른 다이애나…전 세계 추모 이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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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는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며 영국 왕실을 떠났지만 왕실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토니 블레어 당시 총리가 "다이애나는 '국민의 왕세자비'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라고 평가하면서다.

당초 영국 왕실은 다이애나의 장례식을 가족장으로 치를 것을 고려했지만 영국 국민들의 뜨거운 추모 열기에 입장을 바꿔 왕실장을 받아들였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찰스 왕세자를 비롯한 모든 왕실 구성원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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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애나의 죽음에 영국 국민들은 큰 상실감과 슬픔에 잠겼다. 영국 곳곳에 즉석 추모비가 세워졌고, 다이애나가 결혼 생활을 했던 켄싱턴궁전 앞에는 추모 꽃다발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영국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된 장례식에는 600만 명의 애도 인파가 몰렸으며, 장례식 중계 방송은 전 세계 25억 명이 시청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7년 1월 앙골라를 방문해 다양한 지뢰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AFPBBNews=뉴스1다이애나 왕세자비가 1997년 1월 앙골라를 방문해 다양한 지뢰를 살펴보고 있는 모습./AFPBBNews=뉴스1
다이애나는 왕세자비 시절부터 시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것은 물론 어린이, 에이즈 환자 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봉사와 자선활동에 헌신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다이애나는 이혼 후에도 아프리카 빈민촌 구호와 적십자 활동 등에 집중, 더욱 활발한 행보를 보였다.

다이애나가 특히 관심과 애정을 쏟았던 건 저개발국가에 집중 매설된 민간 차원의 대인지뢰 제거 운동이었다. 다이애나가 사망한 지 3개월 후 122개국이 대인지뢰의 사용과 생산, 비축을 금지하는 '오타와 협약'에 서명했고, 이를 주도한 국제 NGO '국제지뢰금지운동'(ICBL)은 그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다시 주목받기도 했다.

다이애나는 여전히 '국민 왕세자비'로 남아있다. 다이애나가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지 벌써 26년이 지났지만 매해 8월31일 그가 살았던 런던 켄싱턴궁과 그가 세상을 떠난 프랑스 파리 알마교 터널 인근의 '자유의 불꽃' 동상 앞에는 그를 잊지 않으려는 추모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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