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풍 이재민이 벼슬이야?"…'대피소'에서 들은 말[남기자의 체헐리즘]](https://thumb.mt.co.kr/06/2023/08/2023082522353016817_2.jpg/dims/optimize/)

달방 비슷한 걸 얻어 살던 노인, 김승학씨(68) 회상이었다. 이 동네가 좋아 자릴 잡았단 그는, 생애 이런 비는 처음 봤단다. 앞이 안 보일 정도였다. 하늘에서, 그야말로 집에 세숫대야로 물을 들이붓는 느낌이었다고.

대피하는 게 급했다. 옷가지를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나왔다. 인근 고등학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이 이미 차올랐다며 출입을 막았다. 근처 노인정으로 갔다. 그랬더니 거주지가 이쪽이 아니라며, 그 동네 경로당으로 가라고 했다. "물이 좀 빠지면 가겠다"고 했으나 안 된다고 했다. '아주 사지로 내모는구나' 생각이 들었단다.
별 수 없이 동네 경로당으로 갔다. 그곳엔 집이 물에 잠긴 이들이 더 있었다. 모두 10명. 승학씨는 이들과 함께 지내기 시작했다.
대피 사흘 만에…경로당이 불편해졌다

급하게 대피한 이들이 잠잘 곳, 먹을 것, 입을 것, 이런 건 해결됐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자기네 거라는 거예요. 소리를 지르고 시비를 걸고. 그래서 여긴 재난당하면 원래 쓰게 돼 있는 거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그게 뭐 벼슬이냐, 그러고요. 고스톱을 치고 냉장고 문도 편히 못 열고, 너무 시달렸어요."
거기엔 중고등학생 아이들도 있어서, 승학씨가 어르신들에게 자제해달라고 했다. 우리 경로당인데, 우리가 왜 자제하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단다. 갈등이 커졌다. 공무원, 마을 이장에게 호소했으나 "그냥 이해해라", "양보하라"는 말뿐이었다.
재난 대피소에 '청소년'들이 있었다

그때였다. 고성에 현장 조사를 온 이가 있었다. 재난구호 전문 NGO인 에이팟코리아의 이동환 팀장(41)이었다. 그는 승학씨가 머물던 경로당에도 왔다. 그리고 계속 오게 됐는데, 이유가 이랬다.

아이들은 며칠 후면 개학이라 교복도 빨아야 했다. 그런데 경로당에 세탁기가 없었다. 그때가 저녁이라 돌아다니며 세탁소를 찾으러 다녔다. 쉬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재민들과 경로당 어르신 간의 갈등도 봤다. 어르신들이 한마디씩 하는 게, 집 잃은 이들에겐 거의 '비수'처럼 꽂힌단 걸 잘 알았다. 승학씨가 심리적으로 불안해하는 것도 보였다. 이 팀장은 그를 따로 불러서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원래 자기들이 쓰던 걸 못 써서 싫었을, 경로당 어르신들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생각보다, 더 생각을 많이 하는 '섬세함'

"숙소 주인을 잘 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10곳 넘게 돌아다녔어요. 상황이 이렇다고. 그러냐고 하면서 자기 아들도 중학생이라고, 이불도 갖다주겠다고 괜찮단 생각이 들었지요. 사람이 안 좋으면 또 상처받고 그럴 거잖아요."
일주일을 예약하고, 현금도 그 자리에서 줬다. 그런 것도 주인 입장에서 잘 신경 써달라고 편하게 해준 거였다. 그러고도 가서 커피를 마시며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잘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그제야 맘이 편했다고, 그런 것까지 한 뒤에야 '내가 지원을 제대로 했다'가 되는 거란다.

생각보다 생각을 더 많이 하는 섬세함. 사소한 것까지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쓰는 거였다. 재난 지원이란 걸 그동안 너무 뭉툭하게 생각했구나 싶었다. 그가 말했다.
"디테일한 것들을 잘 보면서 하고 있어요. 사실 심리적으로 되게 힘들지만요. 이 결정이 맞는 거였는지, 그런 부분이지요. 그래서 재난구호 분야도 교육도, 경험도 많이 필요합니다."
2주가 지났어도…마르지 않은 축축한 집

"얼마나 가고 싶으셨겠어요. 우리는 무조건 여기 가서 잤을 거잖아요. 근데 그게 이렇게 어려웠단 거잖아요."
괴롭고 눈칫밥 먹던 경로당에서 나올 수 있단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진 승학씨를 만나자마자 느낄 수 있었다. 멀리서 여기까지 와줘 고맙다고, 어서 오라고. 얼굴 가득 애정을 담고 환대하는 이를 보며 알 수 있었다. 승학씨는 이 팀장을 두고 "덕분에 너무 잘 지낸다고, 살 것 같다고, 칙사 대접을 해도 부족한 고마운 사람"이라고 했다.
태풍이 한반도를 이륙한 지 2주가 넘었건만, 승학씨 집은 여전히 축축했다. 습한 내음이 코를 찔렀다. 마르는데 시간이 이리 오래 걸릴 줄이야.

이 팀장이 차에 싣고 온 제습기를 꺼내놓았다. 승학씨가 간절히 기다리던 거였다. 전기 코드를 꽂아 틀자마자, 습도 수치가 90% 가까이 떴다.
"이게 지금 90% 차 있다는 거거든요. 숫자가 낮아질 거예요. 40%로 바뀌면 더 안 돌아가요. 문을 닫아두시고, 금방 물이 찰 거예요. 2시간마다 버리셔야 해요."
이 팀장이 차근차근 설명할 때마다, 승학씨는 말 잘 듣는 학생처럼 "예, 그럼요. 예예"하며 고갤 끄덕였다. 그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걸 해주니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다"며 힘을 내어 웃었다.
섬세하게 도와야 하는데, '모금'도 할 수 없는 법(法)

어찌 보면 '사각지대'였다. 여긴 강원도 고성군 안에서도 특별재난지역에도 속하지 못한 곳이었다. 90가구가 수해를 입었지만, 피해 액수가 적단 거였다. 기계적인 기준, 정형적인 시스템. 그것만으론 재난 지원을 다 커버하지 못했다. 이 팀장이 말했다.

왜 여전히 그러고 있을까. 태풍이 지나가고 2주가 지나도 쉬이 마르지 않는 집. 말라도 도배와 장판에 꽤 드는 비용. 집안에 다시 채워 넣어야 할 가전제품이며 물건들. 수해도 태풍도 지나갔으니 다 끝났다고 여겼던 게 생각났다. 끝난 게 아녔다. 시작이었다.

"예산이 필요해요. 만약에 태풍 피해로 모금한다고 하면 자신 있거든요. 그런데 자연 재난으론 법으로 못 하게 돼 있어요.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재해구호협회랑 사랑의 열매 두 곳만 가능하지요. 1970~80년대에 중복 수혜 문제가 있었거든요."
극적으로 법을 바꾸진 않더라도, 모금하는 돈의 1~2%라도 현장에서 활동하는 단체에 내려주는 유연성이 필요하다고. 그래야 각 지역에서 다양해지는 재난에 대응할 수 있단 거였다.
승학씨의 집을 떠날 때, 몇 번이고 손을 잡으며 감사하단 목소리가 들렸을 때.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울먹이는 그의 모습을 봤을 때, 정말 작은 것까지 자세하게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미 여러모로 힘든 사람들일 것이므로.

학교가 끝나고 저녁이 되면 아이들은 축축한 집에 다시 온단다. 임시 숙소엔 공부할 책도, 책상도 없어서다.
도배지가 다 뜯어져 흙빛 벽까지 드러나 엉망이 된, 찔듯이 무덥고 습한 방. 난장판이 된 책상에 영어 단어집이며, 과학 참고서 같은 게 놓여 있는 걸 보고 몹시 마음이 어지러웠다.
두 아이의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물었다. 공부를 잘한단다. 한 아이는 꿈도 있다고.
"전자공학과에 가고 싶다고 해요. 어릴 때부터 그러더라고요."
태풍, 재난, 지원, 공부 같은 키워드를 넣고 포털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봤다. 별다른 결과들이 나오지 않았다.
뭐였을까. 그동안 우리가 놓치고 있었던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