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로 둔갑한 종교 '오대양'…교주 박순자의 두 얼굴사건은 박순자가 1984년 5월 오대양이라는 종교를 만들면서 시작됐다. 그는 다른 종교단체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데리고 나왔다. 오대양이라는 명칭은 박순자가 "난 오대양을 지배할 사람이다. 앞으로 전 세계를 주관할 것"이라고 공언한 데서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오대양은 지역사회에서 '꿈의 직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박순자는 자수성가한 여성 사업가로 명성을 드높였다.

세뇌된 신도들 사이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잘못을 처벌한다는 명목으로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망자도 나왔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 '은혜로운 죽음'이라는 박순자의 말을 믿었다. 박순자는 성공한 사업가와 복지 단체 대표라는 가면을 쓴 채 약 3년간 오대양을 운영했다.
신도들에게 "사채 끌어와라"…170억원 모였다박순자는 사업 자금으로 쓰겠다며 신도들로부터 원금 30~40%를 이자로 주는 조건으로 돈을 빌렸다. 그는 높은 이자를 연체하지 않고 꼬박꼬박 갚으며 신뢰를 쌓았다. 하지만 1986년 4월 빚의 규모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자 박순자는 신도들에게 사채를 끌어오도록 지시했고, 170억원에 달하는 돈이 모였다.
박순자가 빚을 갚지 않자 채권자들은 사채 원금과 이자를 달라고 독촉하기 시작했다. 오대양에 5억원을 투자했던 한 중년 부부는 돈을 돌려받고자 했고, 오대양 공장에서 비서로 일하던 큰딸은 "사장님과 직접 얘기해보라"며 부모를 회사로 불렀다.
부부는 그 길로 회사에 감금돼 직원들로부터 집단 폭행을 당했다. 큰딸과 사위는 폭행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부부는 '5억원을 돌려받지 않겠다'는 포기 각서를 쓰고 간신히 풀려난 뒤 경찰에 신고했다.

박순자의 남편은 실종자들을 찾기 위해 대전 본사로 향했고, 공장 창고에 숨어있던 49명을 찾아냈다. 나머지 실종자들은 찾지 못했다. 용인 공장으로 간 그는 공장을 지키던 식당 아주머니를 추궁했다. 아주머니는 입을 열지 않다가 실종 5일째인 8월29일 "공장에 찾으시는 분들이 있다"고 실토했다.
좁은 천장에 못 올라가 생존했지만…"32명에 못 들어서 서운"공장의 식당 천장에서는 32명의 주검이 발견됐다. 박순자와 세 자녀도 포함돼 있었다. 돈 갚을 능력이 없었던 박순자는 사채 이자를 감당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고, 경찰과 언론의 압박까지 더해지자 신도들과 함께 천장에 숨어 지냈다.
박순자는 천장이 좁아서 신도들을 모두 데리고 올라가지 못하자 자녀들을 포함해 열성적인 믿음을 보였던 신도 31명을 추렸다. 당시 충격을 안겼던 건 천장에 올라가지 못한 생존자들의 "32명 안에 못 들어서 자괴감이 들고 서운했다. '들림' 받지 못해 버림받은 기분이었다"는 증언이었다.

이들의 떼죽음은 의문점을 숱하게 남겼지만, 경찰은 실마리를 풀지 못한 채 집단 자살로 규명하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이후 4년 뒤인 1991년 7월 수배 중이던 오대양 직원 6명이 경찰에 자수하면서 경찰과 검찰은 재수사에 나섰고, 마찬가지로 집단 자살 사건으로 결론 내렸다.
경찰은 자수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오대양 직원들이 철저한 규율과 통제 속에 지냈던 사실을 밝혀냈다. 사건의 핵심 인물로 경찰 추적을 받던 오대양 직원 3명이 이미 집단 변사 사건 전에 규율을 어겼다는 이유로 폭행당해 숨진 뒤 암매장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