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민의 선택은 역시 옳았다! '연인'

머니투데이 정수진(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3.08.22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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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 우려 넘어 급물살 타기 시작한 조선판 휴먼멜로

사진=MBC사진=MBC


MBC 금토 드라마 ‘연인’(연출 김성용 천수진, 극본 황진영)은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과 백성들의 생명력을 다룬 휴먼역사멜로 드라마’를 표방한다. 조선의 임금이 청나라 태종 앞에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했던 치욕의 역사 속에서 연인들의 사랑이라. 과연 시대 배경과 이야기가 잘 맞물릴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 의구심을 타개하고자 ‘연인’은 고전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끌어왔다. 분명 황진영 작가의 의도대로 ‘고난의 역사를 조금은 경쾌하게 시작할 수 있었’으나, 동시에 너무 ‘복붙’이 아닌가 싶은 우려도 들었다. 섣부른 기우였다.

‘연인’의 오프닝은 음울하다. 1659년 효종 10년, 사헌부 지평 신이립(하경)이 씻겨서 없었어야 할 사초(史草)에 적힌 이장현이란 사내의 기이한 행적을 쫒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 세자, 소현세자의 곁에서 믿지 못할 행적들을 보였다는 이장현이란 사내. 이장현이란 이름에만 반응하는, 혜민서 깊은 곳에 갇혀 있는 한 광인.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해변에서 비장하게 서 있는 이장현(남궁민)의 모습을 비추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한편 이 이야기가 절대 해피엔딩일 수 없음을 예감케 했다.



그리고 드라마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1636년의 평화로운 마을 능군리를 비춘다. 식혜와 홍시 맛이 좋고, 술로는 죽순주가 일품이며, 마을 어른들 인심이 온후하여 백성들이 따르고 관에서도 함부로 못하는 곳. 유교사상의 서슬이 시퍼랬던 조선시대임에도 ‘내외의 법도가 맹탕이라 툭하면 여인과 사내들이 사사롭게 어울리는’ 따스한 시골 동네. ‘연인’의 1, 2화는 능군리에서 ‘꼬리 아흔아홉 개 달린 여우’라 불릴 만큼 뭇 사내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유길채(안은진)와 능군리에 자리잡으며 길채에게 묘한 호감을 보이는 이장현, 그리고 능군리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여기서 중장년층을 비롯해 고전영화 애호가들은 강하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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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내들의 마음을 휘젓는 천방지축 미녀 아가씨 길채는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유들유들 여자를 잘 다루는 현실주의자 이장현은 레드 버틀러(클라크 게이블), 길채의 흠모를 받지만 군자의 도리를 배우며 행동하기에 정혼자만을 바라보는 남연준(이학주)은 애슐리 윌크스(레슬리 하워드), 현숙한 여인의 표본인 연준의 정혼자 경은애(이다인)는 멜라니 윌크스(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캐릭터를 고스란히 따온 듯 했다.

1화에서 성균관 유생 연준이 마을 선비들 앞에서 조정이 오랑캐와 싸우는 명나라를 돕기는커녕 오랑캐 와을 달래기 위해 사신을 보내려 한다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자고 할 때, 이장현이 “오랑캐가 명을 이길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하냐”며 조목조목 현실을 따질 때의 모습은 어떻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 북부군을 양키라고 깔보며 승리를 호언장담하던 순진무구한 남부 청년들에게 레드 버틀러가 찬물을 끼얹으며 현실을 짚었던 영화 초반 파티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가져온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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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차용한 설정이 ‘복붙’처럼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지만, 모티프는 모티프일 뿐. ‘연인’은 3화부터 병자호란을 맞닥뜨리며 표방했던 ‘휴먼역사멜로 드라마’의 정체성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사실 ‘병자호란을 겪으며 엇갈리는 연인들의 사랑’에 방점이 찍혀 있을 것이라 여겨, 뒷부분 ‘백성들의 생명력’은 적당히 추임새만 넣는 수준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천만에. 극중 지극한 현실주의자 장현은 일찌감치 피난을 결정한다. 그랬던 그가 피난을 떠나지 않는 것은 한눈에 반해버린 길채 때문도 있지만, 그에게 마음을 열어준 능군리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큰 몫을 한다. 지위 고하와 상관없이 스스럼없이 어울렸던 능군리의 송추할배(정한용)와 그의 아내 이랑할멈(남기애)이 마을 사람들이 무사히 피난을 떠나기 위해 시간을 벌다 오랑캐의 손에 죽자, 백성을 버리고 도망친 임금을 구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도 송추할배와 이랑할멈을 위해서는 칼을 들 수 있다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보라. 장현의 이런 면모를 눈여겨본 소현세자의 내관 표언겸(양현민) 또한 “자네가 조선의 사직을 지키는 것에 관심 없다는 걸 아네. 허나 백성들은 불쌍히 여기지”라며 장현의 도움을 요청할 정도다. 현실주의자였으나 뼛속까지 남부 남자였던 레드 버틀러가 스칼렛을 남겨두고 남부군에 입대해 전쟁에 참여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남궁민은 역시 남궁민이다. 오랜만의 사극인 데다, 연령대가 조금 높지 않나 싶은 염려가 있었으나 그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시청자를 납득시킨다. 무려 조선시대에 ‘비혼’과 ‘섬(주저할 섬)’을 외치는 유들유들한 사내지만 행동해야 할 때는 한없이 재빠르면서도 진중한 모습으로 호감을 산다. 5화에서 소현세자(김무준)와 부딪혔으나 아마 볼모의 신세로 심양에 끌려가게 될 소현세자의 든든한 우군이 되는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과정에서 비쳐줄 다채로운 모습에 기대감이 높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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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맞으면서 사내들의 환심을 사는 데만 열중했던 우물 안 개구리, 능군리 안 화초였던 길채가 살아남기 위해 기지를 발휘하고 사투를 벌이는 변화의 모습도 흥미진진한 시청 요소. 본능적으로 눈길의 발자국을 지우며 오랑캐의 추적을 피하고, ‘위기의 상황에 자결하라’는 극악한 수준의 성교육(?)만 받아본 처녀의 몸으로 방두네(권소현)의 출산을 돕고, 강화도에서는 원손을 구해야만 자신들의 목숨도 부지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재빨리 ‘젖이 도는 방두네’를 내세워 흥정할 줄 아는 영민하고 주체적인 인물로 거듭난다. 위기 상황에 놓인 장현에게 부지불식간에 “서방님, 피하세요!”라고 외치는, 여전히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생명력 넘치는 길채에게 서서히 스며들지 않을 재간이 없다. 마찬가지로 장현과 함께 심양에 가게 될 것으로 여겨지는 길채의 미래가 궁금해진다. 병자호란을 그린 작품에서 여인들의 역할이 대부분 불쌍한 ‘환향녀’에 국한되는 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여주겠지?

이외에도 ‘연인’을 주시해야 할 이유는 많다. 영화 ‘남한산성’ 등 여러 대중매체에서 보아오긴 했으나 척화파 김상헌(최종환)과 주화파 최명길(김태훈)의 대립을 위시로 나라(임금)를 구하고자 하는 연준과 백성을 구하고자 하는 장현의 신념의 차이가 곱씹을 여지를 주고 있다. 앞으로도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쟁과 삶을 대하는 수많은 인물들의 행동과 모습이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할 것으로 보인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사극에서, ‘연인’의 결말이 핑크빛 무드일 순 없다. 그래도 궁금하지 않은가. 조선판 휴먼역사멜로가 빚어낼, 그들의 삶과 사랑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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