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따시와 빠가데시다"…23세 테러리스트, 육영수 여사 저격 [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미루 기자 2023.08.15 05:30
글자크기

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3분쯤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를 향해 총을 쏜 뒤 객석에서 내민 발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 오케스트라석 분리대를 짚고 단상으로 권총을 겨냥하고 있다. /사진=서울기록원1974년 8월15일 오전 10시23분쯤 광복절 기념식이 열린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과 부인 육영수씨를 향해 총을 쏜 뒤 객석에서 내민 발에 걸려 넘어지기 직전 오케스트라석 분리대를 짚고 단상으로 권총을 겨냥하고 있다. /사진=서울기록원


1974년 8월 15일 오전 10시10분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는 제29주년 광복절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연단에 올라섰다. 각계 인사 1000여명은 객석에 자리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경축사를 낭독하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권총을 발사했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육영수 여사가 풀썩 단상 의자에 쓰러졌다. 머리에 총탄을 맞은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옮겨진 후 뇌수술을 받았으나 향년 48세로 사망했다.



총구를 겨눈 채 연단을 향해 계속 달려가던 23세 청년을 객석에 있던 공무원이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오전 10시30분쯤 경호원은 현장에서 넘어진 청년을 체포했다.

공산주의 심취한 재일교포…VIP인 척 행사장 통과
육영수씨가 총격을 받고 단상의 의자에 쓰러져 있다. 객석을 향해 손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은 박상범 당시 경호원으로 알려졌다. /사진=서울기록원육영수씨가 총격을 받고 단상의 의자에 쓰러져 있다. 객석을 향해 손을 가리키고 있는 인물은 박상범 당시 경호원으로 알려졌다. /사진=서울기록원
박 대통령에게 총구를 겨누다 실패해 육 여사를 숨지게 한 23세 청년의 이름은 문세광이었다. 신장 180㎝, 몸무게 80㎏의 거구에 지독한 근시이며 권총 사격 경험이 전무했던 그는 일본 오사카에서 나고 자란 재일교포였다. 그는 1972년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에 포섭됐다.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서적에 심취했다고 전해진다.



사건 당일 아침 문세광은 조간신문을 읽고 광복절 기념식장으로 향했다. 미제 38구경 권총에 실탄 5발을 장전하고 조선호텔을 나섰다. 호텔 택시 차를 타고 식장 앞에 도착한 그는 출입 허가 비표가 없었지만 일본어를 구사해 VIP로 위장, 경호팀에게서 별다른 제지를 받지 않고 식장에 들어섰다.

그는 박 대통령이 축사를 읽는 동안 총 5발을 발사했다. 이 과정에서 객석에 앉아있던 합창단 고등학교 2학년 장봉화양이 경호원에 의해 피격돼 숨졌다. 문세광은 경호원과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검거됐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에 긴급 이송돼 응급치료받았지만 저녁 7시쯤 끝내 사망했다.

127일 만에 사형 집행…"와따시와 빠가데시다"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8부가 심리한 문세광 1심 공판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뉴스 갈무리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8부가 심리한 문세광 1심 공판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뉴스 갈무리
조사당국은 사건 발생 불과 이틀 만에 "북괴의 지령을 받은 재일교포 문세광에 의한 암살 시도 사건"이라는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같은 해 8월24일 문세광은 반공법, 국가보안법 등 13가지 죄목으로 서울지검에 구속 송치됐다. 이어 9월12일 내란목적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등 6개 죄목으로 기소됐다.


검사 출신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이 사건 수사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세광 사건에 관한 외교문서가 공개된 2005년 1월21일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었던 그는 CBS '시사자키 오늘과 내일'에서 당시 자신이 문세광의 자백을 끌어냈다고 주장했다.

1974년 12월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사형선고를 받은 문세광은 법정에서 "사형이 진행되는 겁니까"라고 묻더니 1~2분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알겠다"는 말과 함께 흐느꼈다고 한다.

12월20일 오전 7시30분 서대문 구치소에서 사형이 집행됐다. 사건 발생 127일, 형 확정 뒤 3일 만이었다. 사형되는 날 입회했던 이들이 전한 그의 마지막 말은 "와따시와 빠가데시다"(나는 바보였습니다)였다.

'마지막 총탄, 육 여사 아닌 천장 맞았다' 의혹 제기한 경찰
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8부가 심리한 문세광 1심 공판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뉴스 갈무리서울지방법원 형사합의8부가 심리한 문세광 1심 공판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대한뉴스 갈무리
그러나 의심의 여지가 없는 현행범 문세광이 범인이 아니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서울시경 감식계장으로 수사에 참여했던 고 이건우 당시 경감이 입을 연 것이다. 문세광은 소지한 5발용 권총으로 4발을 발사했다. 마지막 4탄을 놓고 수사발표는 육 여사가 맞았다고 했는데 이 경감은 천장에 맞았다며 다른 주장을 내놨다. 경호원의 오발이거나 진범이 따로 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것.

또 당일 비표도 없이 출입한 점, 권총을 국내 반입한 점, 위조여권으로 비자를 받은 점, 일본과 한국의 수사 결과가 다른 점을 두고 의구심이 나타났다. 그 해 8월29일 외무부 정보보고에는 "일본경시청은 한국 수사 발표가 짜맞추기며 육 여사 저격사건은 과실살인으로 본다"고 보고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한일 관계가 수교 10년 만에 단절되기 일보 직전까지 치달았다는 정황이 2005년 1월20일 공개된 이 사건 관련 외교 문서에서 드러났다. 일본 측의 사건 공동정범에 대한 수사 부진과 조총련에 대한 단속 문제가 갈등 요인으로 떠올랐다. 한국 정부는 일본 측의 수사 협조를 위해 미국에까지 협조를 요청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단교 방침은 박 대통령이 당시 일본 특사와 만난 자리에서도 확인됐다. 박 대통령은 회동에서 "일본 측 태도는 한국을 너무나 무시한 태도"라며 "만약 불행하게도 이런 사건이 재발할 시 양국의 우호관계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날 것을 지극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조총련에 대한 단속을 촉구했다. 그러나 일본은 끝내 조총련에 대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참고 자료
8·15저격사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대한뉴스 1006호
서울기록원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