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깜빡해서 끌려간 '생지옥'…군홧발에 밟힌 4만 시민[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류원혜 기자 2023.08.0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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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기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3년 전인 1980년 8월1일. 삼청교육대가 설립됐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사회 정화'를 이유로 전국에 있는 군부대에 설치한 기관이다. 전두환 정권의 대표적인 인권 침해 사례로 꼽힌다.

삼청교육대의 명칭은 교육 대상자들을 검거하기 위한 군경 합동작전인 '삼청 작전'에서 비롯됐다. 이듬해 1월25일 교육대가 해산되기 전까지 법원 영장 발부 없이 총 6만755명이 체포됐고, 이들 중 3만9742명이 삼청 교육을 받으며 가혹 행위를 당했다.



신분증 지참 안 했다고 끌려갔다…셋 중 하나는 '無 전과'
1979년 '12·12 사태'를 계기로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1980년 5월 비상계엄을 발령하고 국보위를 설치했다. 당시 국보위는 '깡패' 조직을 제거해 민심을 얻으려는 정권 차원의 조치로 '불량배 소탕 계획'을 공표했다.

미리 전과자와 폭력배의 목록을 조사한 이후 작전이 진행됐다. 처음 목표로 삼았던 검거 대상자는 2만여명이었지만, 군대와 경찰 간에 경쟁이 붙어 점차 머릿수를 채우는 방식으로 검거가 진행됐다.



/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사진=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체포 기준은 모호했다. △개전의 정이 없이 주민의 지탄을 받는 자 △불건전한 생활 영위자 중 현행범과 재범 우려자 △사회풍토 문란사범 △사회질서 저해 사범 등이었다.

그나마도 서류상 명시된 내용일 뿐이었고, 실제로는 무고한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권 탄압이 이뤄졌다. 야간 통행금지를 어겼거나 문신을 새긴 경우에도 끌려갔다. 불시 검문 시 신분증을 지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도 검거됐다.

국보위는 '사회악을 없애 국가 기강을 확립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상 정권에 반대하는 이를 억압하려는 목적이 컸다. 고(故) 전두환씨를 비방한 자는 곧바로 삼청교육대로 잡혀갔다.


군경은 6만755명을 체포한 뒤 교육 대상을 마음대로 나눴다. 이들은 △A급 군사 재판 또는 검찰 인계 △B급 순화 교육 후 근로봉사 △C급 순화 교육 후 사회 복귀 △D급 훈방 조치 등 4단계로 분류됐다.

이중 B, C급에 해당하는 3만9742명이 교육 대상이었다. 3명 중 1명(35.9%)은 전과도 없었다. 교육 대상자에는 학생 980명과 여성 319명이 포함됐다.

/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삼청교육대는 4주간의 순화 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장교들은 입소 초기 "4주 후에 보내준다", "훈련 잘 받으면 일찍 간다" 등 말로 안심시켰지만 지옥 같은 4주가 지나도 풀려나지 못하는 훈련생들이 있었다.

교육은 고된 육체 훈련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목봉 체조, 유격 등 훈련과 고문에 가까운 가혹 행위가 이뤄졌다. 구타와 얼차려도 빈번하게 실시됐다. 지시에 따르지 않거나 태도가 불량한 자는 별도로 설치된 특수 교육대에서 혹독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퇴소자는 전과자 취급을 받았다. 당초 국보위는 퇴소자의 전과를 말소하고 특정 직업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 갱생의 기틀을 마련하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는 지켜지지 않았다.

퇴소자의 기록은 경찰서로 넘어갔다. 주민등록등본에는 삼청교육대 이력이 담겼고, 전출입할 때도 감시 대상으로 분류됐다. 경찰은 퇴소자 기록을 범죄 수사에 활용하기도 했다.

삼청교육대에서 54명 사망…20여년 뒤에야 피해 보상
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씨가 1980년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사진=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전직 대통령 고(故) 전두환씨가 1980년 취임 선서를 하는 모습./사진=대통령기록관 홈페이지
1981년 1월25일 계엄령 해제로 삼청교육대가 해산됐다. 그러나 정부는 사후 관리 문서까지 만들어 피해자들이 퇴소한 뒤에도 1989년까지 생활을 감시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취임 후인 1988년 대국민담화에서 "삼청교육대 사건과 관련해 명예 회복과 피해 보상을 하겠다"고 밝혔다. 당시 국방부는 삼청교육대에서 54명이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폭행 등 후유증으로 인한 사망자는 397명, 정신장애 등 상해자는 2786명으로 파악됐다.

하지만 피해 보상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1993년 노 전 대통령은 별다른 조치 없이 퇴임했다. 피해자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으나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기각됐다.

실제 피해 보상이 이뤄진 건 '삼청교육 피해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에 관한 법률'(삼청교육피해자법)이 시행된 2004년 7월 이후다. 하지만 까다로운 보상 규정 때문에 4만명에 이르는 피해자 중 4600여명만 보상을 신청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삼청교육대 설치가 불법이며, 교육 과정에서 각종 인권 유린이 있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8년 대법원은 삼청교육대 설치 근거가 된 계엄포고 제13호에 대해 "헌법과 법률상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무효"라고 위헌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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