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도 못간 용병 반란? "가혹한 보복" 외쳤던 푸틴의 '굴욕'

머니투데이 윤세미 기자 2023.06.2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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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무장 반란을 중단하기로 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전쟁 중 내전이라는 최악의 위기를 면하게 됐다. 하지만 푸틴이 프리고진에 대한 처벌을 면제하며 반란을 눈감아주는 모양새가 되면서 '완전한 통제'를 내세운 푸틴의 리더십이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AFPBBNews=뉴스1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AFPBBNews=뉴스1


24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러시아 도시에서 무장한 남성들이 군 지도부의 해체를 요구하는 모습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따른 불만이 러시아 정권을 위협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번 사태는 프리고진이 23일 러시아 군의 미사일 공격으로 자신의 전투원 2000여명이 사망했다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러시아가 반란 선동 혐의로 프리고진을 조사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자 프리고진은 병력을 이끌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무장 반란의 시작이었다.

러시아는 프리고진에 대해 체포령을 내리고 모스크바 등지에 대테러 작전 체제를 발령했다. 푸틴은 반역으로 규정하며 강경 대응 방침을 밝혔다. 바그너 병사들이 모스크바에 가까워지면서 러시아 군과의 정면 충돌 위기가 고조됐으나 러시아 우방국인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 중재로 프리고진이 철군을 결정하면서 가까스로 유혈 사태는 피하게 됐다. 러시아 남쪽에서 이동을 시작한 바그너 용병들은 모스크바 200km 이내까지 진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크렘린궁은 바그너그룹이 진군을 멈추는 대가로 프리고진과 병사들에 대한 안전을 보장하고 반란 혐의에 대한 기소를 취하한다고 밝혔다. 바그너그룹이 요구하던 군 수뇌부 처벌 여부를 포함해 어떤 구체적인 조건으로 합의가 된 것인지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세스 존스 선임 연구원은 "프리고진은 아마 문득 정신을 차리고 모스크바에서 얼마나 격렬한 전투가 펼쳐질지 깨달았을 것"이라면서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 점령과 달리 모스크바 점령은 "깜짝 공격도, 쉬운 과제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2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한 주민이 도시를 점령한 바그너그룹 소속 병사에게 자신의 반려견을 보여주며 대화하고 있다./AFPBBNews=뉴스124일(현지시간) 러시아 남부 로스토프나도누에서 한 주민이 도시를 점령한 바그너그룹 소속 병사에게 자신의 반려견을 보여주며 대화하고 있다./AFPBBNews=뉴스1
프리고진의 무장 반란은 20시간 만에 종료됐지만 외신은 푸틴의 굴욕이자 반란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내놓는다. 푸틴 대통령은 24일 반란 이후 TV 연설을 통해 "가혹한 대응"을 강조한 바 있다. 블룸버그는 "푸틴이 자신의 요리사로 조롱받던 이에게 굴복하는 것처럼 보이는 위험을 무릅썼다"고 지적했다. WSJ은 "하루 반란의 성공은 러시아 내부에서 추가 모의와 불안정을 키울 공산이 크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푸틴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하면서 스스로 만든 덫에 걸렸다고 분석했다. 시카고대학의 코스탄틴 소닌 러시아 정치학 교수는 "푸틴의 최대 오산은 세계, 자국군, 우크라이나에 대해 완전히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전쟁을 시작한 점"이라면서 "푸틴은 전쟁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매일 오산을 거듭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틴은 지난해 2월 전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러시아가 압도적으로 단기에 승리할 것으로 기대했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기대와 달리 고전하며 무능을 드러냈고 우크라이나는 세계와 힘을 합쳐 러시아 공세를 버텨냈다. 예상과 다른 전개에 따른 사회적 불안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5만명의 용병을 투입하고 우크라이나 동부 격전지 바흐무트를 점령하는 등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프리고진과 바그너그룹의 부상으로 이어졌다.

프리고진은 전쟁 성과를 앞세워 목소리를 키웠고 러시아 군부의 부패와 무능을 저격하면서 불안한 민심을 파고들었다. 그는 또 전쟁으로 더욱 부각된 사회적 격차를 지적하면서 엘리트층의 변화를 촉구했다. 러시아 극우 세력 일각에선 프리고진이 푸틴의 대안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푸틴의 요리사'로 불리던 프리고진이 전쟁을 통해 체급을 치우면서 푸틴을 위협할 만한 상대로 떠오른 것이다.

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프리고진이 24일 점령 중이던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철수할 때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모습이 담긴 영상도 게재됐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프리고진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풀이된다.

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AFPBBNews=뉴스1러시아 용병기업 바그너그룹 수장인 예브게니 프리고진/AFPBBNews=뉴스1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현대판 차르, 황제로 불리는 푸틴이 '역적'에 대한 처벌을 면제하면서 굴복하는 모양새가 됐다. 이는 '스트롱맨'이라는 푸틴의 강인한 이미지를 훼손하며 집권에 상당한 짐이 되리라는 분석이다. 정치 컨설팅업체 R폴리틱의 타차나 스타노바야 대표는 "우리는 프리고진을 과소평가하고 푸틴을 과대평가했다"며 "이번 사태는 푸틴에게 무척 강력한 한방"이라고 말했다.

모스크바 소재 싱크탱크인 전략기술분석센터(CAST)의 루슬란 푸코프 연구원은 "전쟁이 러시아에 도움이 되리라는 푸틴과 엘리트층의 기대는 위험한 환상"이라면서 "전쟁의 장기화는 국내 정치에 점점 더 큰 부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전 세계 각국은 러시아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24일 화상 회의를 통해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 리시 수낵 영국 총리 등과 러시아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미국은 또 오는 27일 바그너그룹에 추가 제재를 가할 예정이었으나 자칫 푸틴의 편을 드는 모습으로 비칠 것을 경계해 잠정 보류했다고 WSJ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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