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대 속 20대女 시신…돈 빼간 '빨간 모자' 무죄, 21년째 범인이 없다[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김미루 기자 2023.05.31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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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5월31일 A씨(당시 22)의 시신이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발견됐다. /사진=부산경찰청2002년 5월31일 A씨(당시 22)의 시신이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발견됐다. /사진=부산경찰청


한일 월드컵 막이 오르던 2002년 5월31일, 한 여성 시신이 부산 낙동강 하구에서 발견됐다. 검은 비닐봉지에 6번, 마대에 2번 싸인 모습이었다. 청테이프로 결박당한 채 흉기에 무려 40군데나 찔린 흔적이 남았다. 피해 여성은 부산 사상구 태양다방에서 일하던 종업원 A씨(당시 22). 발견 열흘 전인 21일 밤 10시에 다방을 나서 11시쯤 지인과 나눈 통화가 그의 마지막 행적이었다.



당시 경찰은 실종 바로 다음 날 붉은 모자를 쓴 한 남성이 A씨 계좌에서 돈을 뽑아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은행 폐쇄회로(CC)TV에 그 장면이 담겼다. 그러나 공개수배에도 남성의 행방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10여년이 흘렀다. 공소시효인 15년을 앞두고 법이 바뀌었다. 살인사건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

이에 부산경찰청은 미제사건 전담수사팀을 구성하고 다시 수사에 나섰다. 15년 전 유력한 용의자였던 남성을 붙잡았다. 목격자 증언도 받았다. 남성을 법정에도 세웠다. 해결 국면에 접어드나 싶었던 이 사건은 2019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법원이 그에게 무죄를 확정하면서다.



'부산 태양다방 여성 종업원 살인사건'은 21년째 미제로 남게 됐다.

'CCTV 속 붉은 모자'…15년 행방 못 찾았다
붉은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쓴 양모씨가 한 은행을 찾아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사진=뉴시스붉은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쓴 양모씨가 한 은행을 찾아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다. /사진=뉴시스
A씨는 사상구 태양다방에서 일했다. 대학교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2002년 5월21일 밤 10시에 퇴근했지만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A씨 언니는 사건 발생 9일 뒤인 5월30일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다. 신고 다음 날 A씨 시신이 발견됐다.

양모씨(당시 31)는 사건 초기부터 유력 용의자로 지목됐다. 실종 다음 날, 붉은색 뉴욕 양키스 모자를 쓴 양모씨가 한 은행을 찾아 A씨 통장에서 돈을 인출해가는 모습이 CCTV에 포착됐기 때문이다. 당시 은행 창구에서 현금 296만원 잔액 모두를 찾았다.


경찰이 양씨의 신원 파악에 주력하는 동안 A씨의 돈을 노리는 인물이 또 포착됐다. 다방과 멀리 떨어진 은행에서 여성 두 명이 돈을 인출해갔다. 두 여성은 A씨의 신분증을 내밀며 통장 비밀번호를 바꾸고 적금통장에서 돈 500만원을 찾았다.

양씨와 두 여성은 자취를 감췄다. 경찰은 이들을 공개수배하고 신고포상금도 내걸었지만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 소행으로 추정하고 주변 인물을 수십명 조사했지만 성과가 없었다. 사건은 그렇게 해결되지 않았고 10여년간 미제로 남아있었다.

태완이법 통과…열흘 만에 SNS 제보 나왔다
부산경찰청 관계자가 검거 경위를 브리핑하는 모습. /사진=부산경찰청 제공부산경찰청 관계자가 검거 경위를 브리핑하는 모습. /사진=부산경찰청 제공
2015년 7월 이른바 '태완이법'이 국회를 통과해 살인죄 공소시효가 사라지면서 사건이 새 국면에 접어들었다. 부산지방경찰청이 미제사건 26건을 전담하는 미제사건전담수사팀을 발족하면서 재수사에 나선 것이다. 이 사건은 미제 26건 중에서도 범인 검거 가능성이 높은 축에 속했다. 범인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모습이 담긴 CCTV까지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경찰이 이 사건을 꺼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올리자 열흘 만에 'CCTV 속 여성 가운데 한 명을 안다'는 결정적인 제보도 등장했다.

수사팀은 2년간 수사 끝에 2017년 유력한 용의자 양씨 검거에 성공했다. 돈을 인출한 여성 2명을 고용한 인물도 양씨인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앞서 청소년 성매매 알선과 부녀자 강도 강간으로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교도소에서 복역했다.

양씨는 경찰에 체포되면서 "영장이 있느냐"고 묻는 등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경찰이 압수한 스마트폰에서는 '살인공소시효' '살인공소시효 폐지' 등을 검색했던 기록이 나왔다. 사건 당시 양씨가 몰던 차량을 중고로 구매한 사람에게서 "의자에 혈흔 같은 붉은 얼룩이 있어 기분 나빴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경찰은 그를 이 사건의 범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양씨는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강도 혐의는 인정하지만 살인은 아니라는 것. 그는 A씨가 실종된 5월21일 저녁 8시 사상역에서 신분증과 통장, 수첩 등이 든 가방을 주웠다고 설명했다. 양씨는 수첩에 써둔 부모의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를 조합해 통장 비밀번호를 우연히 풀었다고 주장했다. 처음 돈을 뽑고 나서도 아무 일이 없어 술집 종업원 여성들에게 A씨의 적금을 찾아오라는 추가 범행을 제안했다고 답했다.

'무기징역→무죄'…경찰 "나쁜 선례"
/사진=이지혜 디자인기자/사진=이지혜 디자인기자
국민참여재판으로 열린 1심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배심원 9명 중 7명이 무기징역과 사형의견을 낸 것이 영향을 미쳤다. 2심도 원심 선고를 유지했다. 당시 A씨 통장 비밀번호는 '6○6○'로 6이 두 번 포함돼 있었는데 양씨가 조합했다는 A씨 부모 주민등록번호와 전화번호에는 숫자 6이 없었다. 2심 재판부는 이를 두고 양씨가 A씨를 협박 또는 폭행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고 추단할 수 있다고 봤다.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2019년 1월 대법원은 중대 범죄에서 유죄를 인정하는 데 한 치의 의혹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2심 재판을 다시 하라고 부산고법으로 돌려보냈다.

1, 2심이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결정적인 단서는 사건 당시 양씨 동거녀의 진술이었다. 2002년 5월쯤 양씨와 함께 둥글고 물컹한 느낌이 있는 물체가 담긴 마대를 함께 옮겼는데 무서워서 어떤 물건이냐고 물어보지 못했다는 자백이었다.

반면 양씨는 최후진술에서 "사람을 살해하지 않았고 피해자와 연관도 없다. 길에서 우연히 가방을 주웠고 또 우연히 통장 비밀번호를 맞췄다"며 "제2의 피해자를 만들지 않도록 재판부가 현명한 판단을 해달라"고 말했다.

부산고법은 "의심스러운 부분이 많으나 유죄를 증명할 간접증거는 없다"며 "동거녀 진술이 구체적이지 않고 수사기관 정보를 자신의 기억으로 재구성했을 가능성이 있어 진술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에 재상고했지만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단이 옳다고 보고 원심이 선고한 무죄를 확정했다. 일사부재리의 효력을 지닌 판결이어서 양씨가 자백하더라도, 직접적인 증거가 나오더라도 양씨는 무죄다.

당시 부산경찰청 미제사건 전담수사팀 관계자는 "증거 인정을 이렇게 엄격하게 하면 장기 미제사건 용의자를 잡기는 점점 더 어렵다"이라며 "다른 미제사건의 용의자들이 이번 판결을 보고 무죄로 풀려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나쁜 선례를 남겼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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