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허투 등 유방암 임상시험 기회, 세계에서 가장 많이 줄 것"

머니투데이 박정렬 기자 2023.05.3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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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의료,인]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박연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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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시험은 사람을 대상으로 신약의 효과와 안전성을 증명하는 과정이다. 주기적으로 약물을 투여하고 상태를 추적 관찰하기 위해 수백~수천억 원이 든다. 성공과 실패를 예측하기 어려워 제약사는 매번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소위 '위험한 약', '안되는 약'에 투자할 리 만무하다.

유방암 신약인 '엔허투'는 현재까지 해당 암에서 11개의 임상시험이 진행(4월 기준, 진행 중 포함)됐다. 초기·전이성 유방암을 가리지 않고 기존 치료보다 훨씬 개선된 성적을 내며 유방암의 새로운 '무기'로 조명받고 있다. 지난해 6월, 미국 임상종양학회(ASCO)에서 엔허투의 유방암 임상 3상 결과가 발표될 때는 그 우수성에 참석자들이 기립박수를 치기도 했다.



엔허투의 뛰어난 치료 효과는 '항체-약물 접합체'(이하 ADC)라는 독특한 구조에서 기인한다. 화이자가 기술 확보를 위해 ADC 개발 전문 기업인 씨젠(시애틀 제네틱스)을 430억달러(약 56조원)에 인수했을 정도로 유망한 기술이다. 머니투데이와 만난 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는 "엔허투를 사용해 암을 치료하는 의사로서 평생 보지 못할 것 같던 생존율 향상 그래프를 볼 수 있었다"라며 "환자에게 가장 좋은 치료 기회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주고 싶어 엔허투의 국내 임상에 전부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엔허투 등 유방암 치료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삼성서울병원 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엔허투 등 유방암 치료 전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사진=삼성서울병원


젊은 유방암 많은 韓, 가정과 사회 '이중 손실'
우리나라 유방암은 서구권과 비교해 '젊은 환자'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우리나라의 유방암 평균 발생 연령은 40대 중후반으로 가정과 사회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때다. 늦은 결혼과 출산, 촘촘한 건강검진 체계 등 여러 이유가 제기되지만 명확하진 않다. 일각에선 젊을 때 나타나는 유전성 유방암이 아시아인의 특징일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박 교수는 "원인이 무엇이든 한국인에게 유방암이란 젊은 사람이 겪는 비교적 흔한 최대 중병 중 하나"라고 표현했다.



이른 시기 암에 걸리면 가정은 물론 사회적인 손실이 상당하다. 본인은 물론 보호자 역할을 책임질 부모와 배우자, 양육 대상인 자녀에게까지 여파가 미친다. 암 중에서 예후가 좋다곤 하지만 전체 환자가 많은 만큼 치료가 어려운 환자도 드물지 않다. 전립선암과 함께 환자가 늘고 있는 유일한 암이란 점에서 난치성 유방암 환자는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블록버스터 의약품에 암세포 죽이는 '폭탄' 붙여
다행히 유방암은 타깃(표적) 치료가 일반화됐다. 에스트로젠과 프로게스테론(호르몬) 수용체가 있느냐(양성) 없느냐(음성), 사람상피세포성장인자 수용체2(HER2)가 있느냐 없느냐에 맞춰 표적 치료 항암제를 처방한다. 이 중에서도 표적 치료 결과가 특히 좋은 타입은 전체의 약 20%를 차지하는 HER2 양성 유방암이다. 표적 치료 항암제(허셉틴, 퍼제타)와 일반적인 세포 독성 항암제(카보플라틴, 도세탁셀)를 함께 사용하는 'TCHP 요법'은 수술 전 선행항암요법으로 뛰어난 치료 결과를 보이며 HER2 양성 유방암의 표준 치료로 수년간 활용돼왔다.

하지만 이 역시 대상 환자가 비교적 제한적이고 특히, 함께 쓰는 세포 독성 항암제의 독성이 만만치 않아 기저질환이 있거나 나이가 많은 환자는 적용하기가 어렵다는 한계가 존재한다. 4기 암 환자의 경우 표준치료의 한계점은 더욱 명확하다. 박 교수가 임상시험에 매진하는 배경이다. 박 교수는 "난치성 유방암에서 정답(항암제)이 없을 땐 임상시험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때 이 약을 쓰지 못해서 죽었다는 생각은 나도, 환자에게도 들고 싶게 하지 않다"고 말했다.


"엔허투 등 유방암 임상시험 기회, 세계에서 가장 많이 줄 것"
최근 그가 최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항암제 엔허투는 표준 치료로 쓰는 허셉틴(트라스투주맙)과 세포 독성 항암제(데룩스테칸)를 붙인 신약이다. 박 교수는 "블록버스터 의약품으로 유방암 환자의 생존율을 높였던 허셉틴에 기반해 약물이라는 '폭탄'을 예술적으로 붙인 약"이라 설명했다. 항체와 약물이라는 두 물질을 하나로 연결하면 1+1 이상의 '시너지 효과'가 발생한다. HER2 수용체가 조금만 있어도 이를 인지해 달라붙고, 암세포 주변에서만 '폭탄'이 터져 부작용은 적고 효과는 크다.

사실 이전에도 ADC를 활용한 유방암 치료제 '케싸일라'가 있었다. 현재 TCHP 요법이 듣지 않는 환자의 수술 후 보조요법에 표준 치료로 쓰인다. 케싸일라도 허셉틴에 세포 독성물질을 붙인 형태지만, 엔허투의 치료 효과가 훨씬 준수하다. 이 둘을 직접 비교한 임상 결과 무진행 생존 기간 중앙값은 엔허투가 28.8개월로 케싸일라(6.8개월)보다 22개월 길었다. 케싸일라를 썼지만, 치료에 실패한 환자에게 엔허투를 쓸 때도 거의 모든 사례에서 치료 반응이 나타난다. 항체는 같지만 서로 다른 약물(페이로드)과 연결체(링커) 기술이 모든 것을 바꾼다. 유전공학의 승리다. 박 교수는 "엔허투는 임상적 가치가 커 2차 치료부터 4기 유방암의 1차 치료, 수술 전(선행), 수술 후 재발, 뇌전이 환자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임상이 진행되고 있다"며 "일반화하기 어렵지만, 우리 병원에도 선행에서 수술 후 재발까지 임상 연구로 참여한 환자 사례가 있다"고 전했다.

항암 신약 '코리안 패싱' 마음 아파, 정부 역할 중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임상시험 강국이다. 상급종합병원에 암 환자가 몰리다 보니 대상자 모집이 쉽고 진행 비용이 덜 든다. 글로벌 제약사들이 한국을 선호하는 이유다. 삼성서울병원은 박연희 교수 등 명의 반열에 오른 의료진의 '맨파워'에 힘입어 전국 유방암 환자의 10% 이상을 책임지고 있다. 그가 수행 중인 유방암 임상시험은 엔허투를 포함해 70~80개에 달한다. 임상을 의뢰한 글로벌 제약사에서 "총알처럼 날아다니며 일하느냐"고 물었을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산다.

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사진=삼성서울병원박연희 삼성서울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 /사진=삼성서울병원
하지만 임상시험을 진행하는 건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글로벌 빅파마에게 한국은 작은 시장이다. 임상시험을 한국에서 진행해 '맞춤 신약'을 출시해도, 가격이 비싸 정부 주도의 의료급여를 받지 못하면 그나마 작은 시장성마저 담보할 수 없다. 한국에서 꼭 임상시험을 할 필요도, 신약을 무조건 출시할 이유도 없는 셈이다.

한국 의료진은 신약을 쥔 글로벌 제약사에게 경제적인 이점과 높은 의료 수준 등을 앞세워 임상시험 '수주'에 나선다. 박 교수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제약사와 '갑'과 '을'을 넘나드는 신경전을 벌이면서도 그는 환자를 우선 생각한다고 했다. 글로벌 제약사에게 치료 기회를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그 임상이 한국 환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설계하려 머리를 싸맨다. 박 교수는 "짧지만, 의미 있는 삶의 연장을 위해 수많은 환자가 나를 찾는데 이들이 손해를 보는 건 참을 수 없다. 그건 한국 의사로서 나의 자존심"이라며 "어렵게 만든 신약 도입의 기회를 경제적인 이유로 글로벌 제약사가 포기하는 '코리안 패싱'이 가능한 한 일어나지 않게, 한국 정부라는 '보험사'가 제대로 된 역할을 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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