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아 못돼져라, 나도 미워할테니" 2군서 돌아온 '천재 유격수', 따끔한 조언의 깊은 속뜻

스타뉴스 안호근 기자 2023.05.26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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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 김재호가 25일 삼성전 끝내기 안타를 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두산 김재호가 25일 삼성전 끝내기 안타를 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사진=안호근 기자


19년 전 '천재 유격수'라 불리던 밝은 미소가 인상적인 소년이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거대한 경쟁자에 밀린 그가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두산의 전성기를 이끈 리그 최고의 유격수이자 베어스의 '캡틴'이었다.

최근 몇 년 사이 김재호(38)는 빠르게 잊혀져 갔다. 올 시즌도 2군에서 보름 이상을 보냈다. 올 시즌 3번째, 근 한 달 만에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린 그는 오랜 만에 팀 승리의 주역이 됐다.



25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삼성 라이온즈전 9번 타자 유격수로 출전한 김재호는 양 팀이 3-3으로 팽팽히 맞선 11회말 2사 만루에서 짜릿한 끝내기 안타로 팀에 4-3 승리를 안겼다.

김재호가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날리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김재호가 11회말 끝내기 안타를 날리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끝내기 안타를 날리고 더그아웃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김재호. /사진=두산 베어스끝내기 안타를 날리고 더그아웃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는 김재호. /사진=두산 베어스
2군서 돌아온 '천유', 완벽했던 귀환 신고
좀처럼 승부의 향방을 읽기 힘든 경기였다. 김재호가 경기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고는 더더욱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렇기에 두산 팬들에게나 이승엽 감독, 본인에게도 뜻 깊은 하루였다.



늘 베테랑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승엽 감독은 "최고참 김재호가 최고의 타격으로 팀에 귀중한 1승을 안겼다. 노림수와 타격 모두 완벽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랜 만에 선발로 나선 김재호는 앞서 3회 중전안타로 출루해 양석환의 2타점 적시타 때 홈을 밟았고 5회 볼넷도 얻어내며 감각을 조율했다. 2-3으로 끌려가던 10회말엔 희생번트로 2루 주자 박계범을 3루로 보내며 동점의 발판을 놨다.

11회말 2사 1,2루에서 장승현이 날린 타구가 1루수 파울 라인 밖으로 높게 떴다. 모두가 12회로 향할 것이라 예상하는 순간 이태훈이 타구를 놓쳤다. 경기 후 만난 김재호는 "그 순간 무조건 내게 기회가 올 것이라 생각했다"며 "보여주고 싶었다. 스스로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 (이걸 계기로) 올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장승현이 볼넷으로 걸어나갔고 김재호는 삼성 홍정우의 속구를 통타, 좌익수 앞에 떨어지는 안타로 승리의 주역이 됐다. 2020년 6월 6일 잠실 KIA 타이거즈전 이후 근 3년 만에 기록한 개인 통산 4번째 끝내기 안타였다.

끝내기 안타를 날린 김재호(가운데)에게 동료들이 물 세례를 붓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끝내기 안타를 날린 김재호(가운데)에게 동료들이 물 세례를 붓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낯설기만 한 2군 생활, 마음을 다잡았다
개막 엔트리에 포함됐고 한 달 가까이 1군과 동행했으나 그 기간 선발로 나선 건 2경기에 불과했다. 지난 5일 엔트리에서 말소된 뒤 2군에서 보름 이상을 보냈다. 입지가 줄어든 탓에 친구인 장원준의 통산 130승 달성 때에도 뭉클한 마음을 안고 뒤에서 묵묵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장원준의 멘탈을 본받고 싶다던 그에게도 2군 생활은 확실히 도움이 됐다. "솔직히 처음에는 좀 많이 속상했다"는 김재호는 "2군에 선수들이 다 젊지 않나. 그 친구들하고 같이 경쟁하려니 한편으로는 좀 그런 마음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정훈 퓨처스 감독은 김재호가 마음을 다잡을 수 있게끔 도왔다. "감독님께서 '야구 선수가 경쟁하는데 나이가 어디 있냐'는 말씀을 해주셔서 마인드컨트롤도 많이 했다. 대학교랑 경기하는 데도 나갔다"며 "경기를 예전만큼 못 나가다 보니까 경기 감각이 많이 떨어져 심적으로 불안한 마음이 좀 컸다. 2군을 다녀오면서 경기를 많이 하니까 그런 부분에서 도움이 많이 됐다"고 밝혔다.

10년 고생을 떠올린 김재호 "후배들아 못돼져라"
당장 은퇴를 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 1군에서 팀에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후배들의 성장과도 맞물려 있다. 시즌 전부터 이승엽 감독은 유격수 경쟁에 대해 언급하며 "다 고만고만하다"고 이례적인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시즌 개막 후 43경기를 치른 현재 1옵션이던 이유찬(25)은 부진 끝에 2루수로 자리를 옮겼고 안재석(21)은 부상에서 회복해 퓨처스리그에서 감각을 끌어올리고 있다. 최근엔 박계범(27)이 주전 유격수로 뛰고 있지만 여전히 확실한 주전 유격수라 평가할 만한 선수는 없다.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와 함께 두산이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던 데엔 김재호의 역할이 컸다. 이젠 그의 뒤를 이어 두산의 내야를 책임져야 할 선수가 튀어 나와야 할 시점. 그렇기에 후배들의 더딘 성장에 대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김재호는 "어떻게 보면 그 친구들한테는 스스로를 각인시킬 수 있는 자리가 하나가 비어 있는 셈"이라며 "그런 점에서 좀 더 못 되게 굴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재호가 3회 안타 이후 양석환의 적시타 때 홈으로 파고들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김재호가 3회 안타 이후 양석환의 적시타 때 홈으로 파고들고 있다. /사진=두산 베어스
10회말엔 희생번트로 동점의 발판을 놨다. /사진=두산 베어스10회말엔 희생번트로 동점의 발판을 놨다. /사진=두산 베어스
스포츠계에서 '착한 선수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성격의 좋고 나쁨이라기보다는 경쟁에 임하는 독기라고도 풀이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는 후배들이 모질지 못하고 여린 마음으로 인해 무언가를 과감히 시도하는데에도 주저함과 두려움이 있다고도 전했다.

김재호는 "못 되게 굴려면 일단 실력이 돼야하는 것도 맞다. 나를 어필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됐으면 좋겠다"면서도 "그런데 너무 착하다 보니까 그런 모습들이 좀 약하다. 파이팅도 넘쳤으면 좋겠고 실력도 실력이지만 정신력으로도 그걸 이겨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약해지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김재호 또한 그 같은 유형의 선수였고 그 영향 탓인지 10년이라는 시간을 묵묵히 참고 기다려야 했다. "나도 어렸을 때부터 야구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여기 와서 고생을 많이 했다. 나 또한 착했다"며 "(손)시헌이 형이라는 경쟁자가 있었지만 그 형이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마음 자체가 벌써 지고 들어가는 마음"이라고 전했다.

김재호도 예외일 수는 없다. 그는 "그래서 나도 아직 (경쟁자들을) 미워한다"면서도 "솔직히 경쟁이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야구 선수로서는 많은 나이다. 그래도 내가 못하더라도 버텨낼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유종의 미를 꿈꾼다. "베어스 선배님들이 나갈 때 보면 마지막까지 경기를 하지 못하고 대부분 2군에서 생활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며 "끝까지 1군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선수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나타냈다.

승리 후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김재호(왼쪽에서 2번째). /사진=두산 베어스승리 후 동료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김재호(왼쪽에서 2번째). /사진=두산 베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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