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중앙은행 총재들의 롤모델." (리차드 포르테스 런던 비즈니스스쿨 교수)
나비울리나 총재는 소련 말 모스크바 대학에서 '자본론'을 파고들 정도로 칼 마르크스에 심취했다. 그는 1990년대 무역회사에 근무하면서 자유시장 경제를 체득했다. 이후 러시아 싱크탱크에서 푸틴 대통령의 경제정책 구상에 참여했다. 이때 나비울리나 총재를 눈여겨보던 푸틴 대통령은 그를 '팀 푸틴'에 합류시켰고, 2013년 중앙은행 총재 자리에 앉혔다.
이런 경우 외화보유고를 풀어 환율을 방어하는 게 전통적인 러시아 방식이었으나, 나비울리나 총재는 달랐다. 기준금리를 17%로 올려 시장에 풀린 루블화를 흡수하는 방식을 택했다. 여기서 아낀 달러를 러시아 기업에 풀어 달러 부채로 인한 도산을 예방하는 한편, 6000억 달러가량의 중앙은행 자산을 금과 유로, 위안으로 교환해 달러 의존도를 낮췄다. 서방의 추가 제재를 예상하고 대비책을 세운 것이다. 이 해외자산은 8년 후 우크라이나 침략의 군자금으로 활용된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러시아 경제 파탄을 우려해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략에 반대했으나 푸틴 대통령을 설득하지는 못했다. 파이낸셜타임즈(FT)와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을 종합하면 나비울리나 총재는 TV로 침략 소식을 접한 뒤 푸틴 대통령에 사의를 표했으나, 푸틴 대통령은 세 번째 임기와 함께 서방의 제재를 방어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나비울리나 총재와 친분이 있는 인사들은 본인이 없으면 러시아 경제는 파탄에 빠질 수 있고, 그 피해는 무고한 국민들에게 돌아갈 것이란 생각에 그가 푸틴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들였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나비울리나 총재의 예상대로 서방은 즉시 강력한 금융제재에 나섰다. 특히 러시아 중앙은행의 해외자산 3000억 달러를 일시에 동결한 것은 나비울리나 총재의 예상을 벗어난 특단의 조치였다. 루블화 가치는 지난해 3월 달러당 134루블을 기록할 정도로 폭락했고, 러시아 정부는 디폴트 위기로 내몰렸다.
여기서 나비울리나 총재가 또 한 번 기지를 발휘한다. 나비울리나 총재는 우크라이나 침략 직후 기업의 달러·유로 보유분 중 80%를 루블화로 교환하도록 강제하고 시중은행의 달러·유로 판매를 틀어막아 외환보유고를 채웠다. 동시에 기준금리를 9.5%에서 20%까지 두 배 넘게 올렸다. 2014년 때와 같은 방식으로 루블화 흡수를 통한 환율방어에 나선 것이다.
영국 가디언은 "기준금리 20% 인상 조치로 대출이 효과적으로 차단됐다"며 "동시에 예금의 매력도가 상승해 예금주들이 패닉에 빠져 대규모 예금인출을 시도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물론 푸틴 대통령의 철권통치 때문에 예금인출은 엄두도 내지 못한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IIF 소속 이코노미스트 엘리나 리바코바는 "GDP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며 제재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측에서 서방의 제재 의지를 꺾기 위해 통계를 조작 발표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숫자에 개의치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밀로프 전 러시아 에너지부 차관도 "차라리 이혼율, 주류 판매율 같은 지표를 검토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중앙은행의 통제에도 한계가 있으므로 제재를 더 밀어붙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