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종합상사

머니투데이 강기택 산업1부장 2023.05.22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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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이토추상사는 1973년 1차 오일쇼크를 예상하고 석유를 매집했다. 석유수출구기구(OPEC)가 감산과 금수조치 등을 취하자 되팔아 차익을 얻었다. 세지마 류조 업무본부장(기획 임원)이 작성한 '국제정세 보고서'에 근거한 의사결정이었다. 그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와 일본군 대본영 참모를 지낸 인물이다. 만주에서 종전을 맞는 바람에 11년 동안 소련군 포로로 억류됐다. 귀국 후 40대 후반의 나이로 이토추 상사에 들어가 석유와 항공기 사업 분야에서 일했고, 회장까지 오른다.

한국에도 영향을 끼쳤다. 석유와 달러가 부족해 수출확대를 고심하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종합상사 설립을 권했다. 이병철 당시 삼성그룹 회장이 이를 좇았다. 1975년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생겼을 때 삼성물산이 1호가 된 배경이다. 세지마 류조와 종합상사를 소재로 한 야마자꼬 도끼오의 '불모지대'는 1980년대 초반 번역돼 인기를 끌었다. 주인공 이끼 다다시를 역할모델 삼아 상사맨을 꿈꿨던 이도 적지 않다. 2 009년 후지TV가 방영한 '불모지대' 드라마도 그 즈음의 자원개발 분위기와 맞물려 국내에 유통됐다.



성장과 번영을 구가하던 종합상사는 한동안 무용론에 직면했었다. 제조업체가 독자적인 영업망을 구축하면서 중개역할이 필요 없어진 까닭이다. 제조에서 판매까지 가치사슬 전반을 아우르는 변신을 하거나, 업을 바꾸거나 하면서 생존을 도모해야 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등 지정학적 사건과 공급망 재편은 종합상사의 존재감을 다시 부각시켰다. 에너지와 광물, 곡물 등에 대한 트레이딩과 공급망 관리 능력을 골고루 갖춘 종합상사의 재발견이 이뤄졌다.

특히 유심히 지켜본 이가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버핏은 2020년 8월부터 미쓰비시상사, 이토추상사, 미쓰이물산, 스미토모상사, 마루베니 등 일본 5대 종합상사의 지분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보유지분은 각각 7.4%에 달한다. 그 사이 일본 종합상사의 매출과 이익은 극적으로 개선됐다. 석유, 가스, 곡물 등의 가격이 급등한 덕분에 지난해 역대급 실적을 냈다. 주가도 올라 최근 닛케이지수가 신고가를 경신하는데 기여했다.



일본의 종합상사는 영리를 추구하면서도 국익에 이바지했다. 내각조사실, 통상산업성 등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정부와 협업해 해외에서 자원을 개발·생산해 자국 물량을 확보하고 있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거저 된 일은 아니다. 일본은 2004년 석유·가스·광물 공기업을 통합한 독립행정법인 '일본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JOGMEC)를 세워 자본출자와 기술지원 등을 해 왔다. 종합상사와 같은 민간기업의 자원개발 의욕을 고취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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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는 수치가 말해 준다. 일본의 2021년 석유·천연가스 자원개발률은 40.1%로 높아졌다. 일본정부는 2021년 10월 발표한 '제6차 에너지기본계획'에서 석유·가스 자원 개발률을 2030년 50%, 2040년 60% 이상으로 확대하는 장기계획도 제시했다. 반면 한국의 석유·천연가스 자원개발률은 10.7%에 그친다. 10여년 전 수준이다. 김대중정부, 참여정부, 이명박정부를 거치며 이어지던 자원개발이 '적폐'로 몰리며 사실상 중단됐던 탓이다. 석유공사와 가스공사, 광해광업공단 등의 자원개발 상황은 '단절'과 '붕괴'로 요약된다.

JOGMEC은 지난해 지원범위를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에서 수소와 암모니아, 탄소포집저장(CCS) 등으로 넓혔다. 자원개발 생태계를 풍성하게 하기 위한 차원이다. 자원빈국인 일본이 에너지제국의 미래를 설계해 나갈 동안 한국은 '에너지정치'는 있되 '에너지전략'은 없었다. 종합상사를 비롯한 기업들만 고투했다. 자원개발의 '잃어버린 10년'을 한시바삐 복원하는 것, 정부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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