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면수심 父의 '가족 살해극'…"사형 선고해" 끝까지 뻔뻔했다 [뉴스속오늘]

머니투데이 전형주 기자 2023.05.13 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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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뉴스를 통해 우리를 웃고 울렸던 어제의 오늘을 다시 만나봅니다.

/사진=뉴스1 DB /사진=뉴스1 DB


2009년 5월 13일 오전 11시. 경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신고자는 20대 초반의 여성.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아빠가 날 죽이려 한다. 빨리 와달라. 도와달라"며 "저는 성폭행을 당했다. 엄마와 동생도 죽었다"고 호소했다.



경찰은 즉시 현장으로 출동해 여성을 구조했다. 또 여성의 진술대로 집과 차 등을 수색, 나체로 결박된 채 숨진 시신 두 구를 발견했다. 여성의 모친과 의붓동생이었다.

"가해자는 나갔습니까" 경찰이 물었다. 여성은 "잠깐 나갔다. 다시 온다고 했다"고 답했다. 경찰이 아빠의 이름을 묻자, 여성은 울먹이며 떠는 목소리로 "이항렬"이라고 말했다.



사건 전 두 차례 미성년자 성폭행…장기 복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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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렬은 만 20세였던 1987년 1월 27일 첫 범행을 저질렀다. 귀가하던 16살 여고생을 과도로 위협하고 성폭행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당시 이항렬에게는 3년 전부터 교제해 온 여자친구 A씨가 있었다. 다만 A씨가 임신하고 잠자리가 어려워지면서, 그는 욕구 불만이 심각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이항렬에게 옥바라지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가족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힌 그는 다른 남성과 만나 재혼했다.


이항렬은 A씨의 재혼을 알고 크게 좌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9년 12월 출소했지만 2년 만인 1991년 또 한 번 여중생을 석궁으로 위협, 납치해 3번 성폭행한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항렬은 2005년 10월 28일 출소해 전남 영암군에 있는 한 조선업체에 취직했다. 특히 2007년 남편과 별거하고 있던 A씨와 다시 교제를 시작하면서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는 당시 A씨가 전남편과 낳은 의붓딸도 데리고 살기로 하고 살림을 합쳤다.

무차별 살인극, 친딸까지 성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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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평온한 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항렬은 2009년 5월 5일 첫 살인을 저질렀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던 둘째 처조카 B(16)양을 훔쳐보다 성폭행한 그는 범행이 발각될 것을 우려해 아예 살해하기로 했다. B양을 결박해 여행용 가방에 넣고 자택 인근 야산에 매장했다.

또 알리바이를 위해 B양의 명의로 새 휴대폰을 개통했으며, 이 휴대폰으로 가족에게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보냈다. 파출소에 가장 먼저 B양의 실종 신고를 한 것도 이항렬이었다.

다만 이항렬은 이후에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달 12일 의붓딸과 아내 A씨까지 성폭행하고 목을 졸라 살해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A씨의 친정 식구 모두를 몰살할 계획까지 세웠다.

이튿날 '이모가 널 보고 싶어 한다'며 첫째 처조카 C양을 꾀어내 성폭행 및 감금했으며, 같은 날 새벽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온 친딸도 성폭행한 뒤 "내가 다 죽였다. 너도 죽이고 나도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피해자들, 다시 만나도 살해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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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에 넘겨진 이항렬은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재판부에 "피해자를 다시 만나더라도 다시 한번 죽였을지도 모른다", "할 말이 없다. 원심에서 선고한 사형을 그대로 선고해 달라"고 말했다.

특히 둘째 처조카 B양을 살해한 것에 대해서는 "B양이 나를 유혹해 성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 그로 인해 행복한 가족관계가 파괴돼 악감정을 갖게 됐다"며 자신의 범행을 정당화했다.

또 "친딸을 성폭행할 생각은 없었지만 친딸만 내버려 둘 경우 다른 사람들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 염려돼 어쩔 수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항렬은 2010년 3월 25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됐다. 13년이 지난 2023년 지금까지 형집행대기자 신분으로 수감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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