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남국 교수
후기 지구화 시대는 지구화가 가져온 이익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었는가에 의문을 품은 시민들이 지구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서 시작됐다. 이 시대는 브렉시트나 도널드 트럼프의 집권, 민족주의 부활 등을 통해 신고립주의가 전면화하는 양상으로 나타났고 동시에 시진핑, 아베, 푸틴 등 스트롱맨의 등장과 강력한 국가의 부활, 힘을 통한 문제해결을 선호하는 강대국 사이 패권적 경쟁의 일상화로 나타났다. 또한 권위주의의 귀환과 더불어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규범적 가치에 대한 폄하와 함께 반지성주의가 확산하는 현상을 보였다.
1992년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빌 클린턴 후보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유명한 슬로건을 내세웠다. 걸프전쟁 승리 직후 변화를 원하는 시민들의 심리와 경제불황을 파고든 이 슬로건으로 클린턴은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을 물리치고 선거에서 승리했다. 물론 그동안에도 문제는 경제지만 해결책은 정치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러나 최근 세계 질서의 변화는 더욱 분명하게 정치가 문제고 해결책도 정치에서, 다시 말해 민주주의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새로운 환경에 동요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정치적 의사결정의 비효율과 무능력을 비난하며 전문가를 자처하는 기술관료 중심의 과두제가 득세하거나 기존 절차와 제도를 파괴하고 집단적 반엘리트 접근을 주장하는 민중주의가 등장할 때 민주주의의 좁은 가능성의 균형은 깨진다. 민주주의 유지에 요구되는 적극적인 역할에 괴로워하는 시민들에게 우리가 전문가로서 결정을 대신해준다거나 선과 악, 적과 동지를 대신 판단해주겠다는 제안을 시민들이 묵인할 때 민주주의는 위기에 처하는 것이다.
시민의 역할과 함께 제도적 구성도 중요하다.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그리스인의 관점에서 로마와 그리스 정치체제를 비교분석했다. 그가 보기에 기원전 6세기에서 1세기에 걸친 로마공화국은 다양한 정치체제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보완해 안정된 혼합정치제도가 정착한 사례였다. 즉 최고 통치자인 집정관, 귀족적 요소인 원로원, 민주적 요소인 민회가 서로 협력하고 견제하며 가장 안정적인 정치제도를 창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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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폴리비오스가 보기에 그리스는 지나치게 리더십에 의존했다. 솔론과 같이 뛰어난 인물이 출현했을 때는 성공했지만 이러한 성공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는 우연에 불과했다. 어떻게 보면 현대의 민주주의도 집정관적 대표와 원로원적 심의, 민회적 참여를 바탕으로 견제와 균형 속에 지속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폴리비오스 시대와 다른 점이 있다면 민주주의의 운명이 일국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디지털 전환, 기후변화, 팬데믹 등의 위기 앞에서 세계 시민과 세계 민주주의 사활이라는 글로벌 차원의 문제가 됐다는 점이다.